본지 9월 24일자 A13면에 나온 시각장애 기수 이병하씨 기사. “국내 첫 시각장애 기수 대회 출전 ‘한번만이라도… 마음껏 달리고 싶었다’”란 제목으로 소개됐다.

"앞에 말이 있으니 한번 만져봐요." 검은 선글라스를 낀 강사가 말했다. "앞에 있었어요?" 옆에 서 있던 다섯 사람이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섰다.

강사는 주저하는 사람들의 손을 끌어 말 '징기즈칸'에게 가져다 댔다. "우와. 정말 크다. 내 키보다 큰 것 같아 무서워요." "다리는 생각보다 가느네? 내 몸통만 할 줄 알았는데." 조심스레 말을 만지던 이들은 탄성을 질렀다.

강사는 이들에게 말의 몸통과 갈기, 다리, 꼬리를 차례대로 만져보게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말 '필드' 위에 올라탔다. 이번엔 자신의 발과 무릎, 허리를 꼼꼼히 만지게 했다. 한 명씩 말에 올라탔다. "엉뚱한 곳으로 가는 느낌이 들 때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어주세요."

26일 오후 2시 광주광역시 용두동 광주첨단승마클럽. 짙은 선글라스를 쓴 강사, 먼 곳을 보며 몸을 돌리고 있거나 눈을 감고 있는 학생들. 이들은 모두 시각장애인이다. 강사 이병하(34)씨는 '시각장애인 최초의 승마선수'로 본지에 보도됐다〈9월 24일자 A13면〉. 지난 9월, 병하씨는 승마를 시작한 지 2개월 만에 전국대회에서 66명 중 25위를 차지했다. 그날 이후, 병하씨의 '승마의 기적'은 이어지고 있다.

병하씨 휴대폰은 기사가 나간 뒤 30명이 넘는 시각장애인들과 각종 장애인 단체들의 전화로 몸살을 앓았다. 자신들도 시각장애인인데, 병하씨처럼 승마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시각장애인들은 늘 조심스레 움직이기 때문에 '말을 타고 달려가는 속도감'은 참으로 느끼기 힘들다.

병하씨는 얼마 전부터 승마장에 온 시각장애인들의 '코치'가 됐다. "경험은 적지만 그들 입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병하씨는 '코치 수락'의 변을 대신했다. 병하씨는 시각장애인들이 오면 함께 승마장 울타리를 따라 걸어 크기를 가늠시킨다. 그런 다음 말을 타고 한 바퀴 돌며 말발굽 소리를 듣게 한다.

26일 오후 광주광역시의 광주첨단승마클럽에서 시각장애인 코치 이병하(오른쪽)씨의 설명을 들으며, 시각장애인 강상술(35·왼쪽)씨와 김진석(20)씨가 태어나서 처음 말을 만져보고 있다. 눈을 감은 강씨는“지금까지 만져본 동물 중 가장 크면서 털은 굉장히 부드럽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은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알 수 있다. 이날 승마를 배우러 온 시각장애인 박계춘(54)씨는 "병하씨는 모든 것을 직접 만져보게 해요. 또 우리 시각장애인들이 무서워하는 부분과 즐거워하는 부분을 정확히 아니 참 든든하죠"라고 말했다.

승마장도 시각장애인들에게 문호를 넓혔다. 승마클럽 원장 김병훈(48)씨는 이들에게 2주마다 무료 승마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다. 기사가 나간 뒤 지금까지 시각장애인 20명이 이곳을 방문했다. 김 원장은 "시각장애인들이 일반인도 쉽지 않은 승마에 도전하는 모습에서 '사람에겐 한계가 없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다"면서 "이들의 열정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려고 내년 6월까지 현재 총 4000평의 부지에 1200평을 증설해 전국 최초로 시각장애인 전용 승마장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반 승마장 회원들도 시각장애인들의 방문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날도 승마장 회원 두 명이 시각장애인들의 교관을 자청하고 나섰다. 일일 교관을 맡은 회원 김진(48)씨는 "시각장애인들이 활짝 웃으며 말을 타는 모습을 보니 내가 더 기분이 좋더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들은 아직 천천히 걷는 평보(平步) 단계다. 나중엔 병하씨가 했던 것처럼 경기장 곳곳에 카세트테이프를 설치해 음악으로 위치를 익혀 빨리 달릴 계획이다. "저도 병하씨처럼 내년 4월 열리는 승마대회에 참가할 거예요. 당연히 1등이 목표고요." 승마를 마친 시각장애인 강상술(35)씨가 말했다. "시각장애인들에겐 운동할 만한 종목도, 장소도, 시간도, 돈도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저의 도전이 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 것 같아요. 제2, 제3의 선수가 나타나 기적이 계속 이어지면 좋겠어요." 병하씨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