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정 행정학과 1년, "재수 포기… 컨벤션기획사로 남보다 앞선 첫발"

국립한국방송통신대학교(이하 '방송대') 행정학과 12학번 전세정(19)씨의 하루는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이제 갓 대학 신입생 티를 벗은 그에겐 다양한 직함이 있다. 방송대 행정학과 스터디 그룹 '온새미로' 회원, 방송대 홍보단원, 서울컨벤션뷰로(서울시 주관 국제회의 운영기구) 제5기 운영부장, 한국청년정책연구원 '중학교 모의창업캠프' 멘토…. 고교 시절 친구들과 설립한 고교생 전국모의유엔대회 운영 단체 '글리스(Glis)'에선 마케팅 이사를 맡고 있다. (2012년 12월 현재 글리스의 총 회원 수는 350여 명이다.) 지난 7월엔 국제회의 전문 기획가에게 주는 컨벤션기획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전씨가 '1인 다역'을 왕성하게 소화해내는 비결은 '(방송대 특유의) 자유로운 시간 활용'이다. 그렇다고 공부에 쏟는 시간이 적은 건 아니다. "저보다 사회에서 훨씬 많은 역할을 소화하면서 학업에 매진하는 동기들을 보면 도저히 게으름을 피울 수 없어요."

그가 처음부터 방송대 진학을 목표로 했던 건 아니다. "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 영역 답안을 밀려 쓰면서 목표로 하던 대학 진학에 실패했어요." 재수를 결심한 그에게 방송대 진학을 권한 건 그의 어머니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고학력자이신 어머니는 늘 '명문대 진학보다 중요한 건 네 자신을 잃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입학 이후에도 한동안 그의 머릿속은 재수 생각으로 가득했다. 곧 대학생활과 재수공부를 병행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조금씩 지쳐가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꿈'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국비로 컨벤션기획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자격증을 취득한 후 그 길로 재수 공부를 그만뒀습니다."

서울컨벤션뷰로 운영부장으로까지 발탁되면서 전씨는 새삼 방송대의 고마움을 실감했다. 국제회의 기획자를 꿈꾸는 그의 목표는 '세계 방송대 총장 회의'를 기획하는 것. "제 손으로 방송대에서 받은 혜택을 후배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이강일 영어영문학과 4년, "올해 나이 열여덟… 벌써 졸업반이에요"

이강일군은 이색 이력 소유자가 즐비한 방송대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다. 1994년생으로 올해 나이 18세인 이 소년은 내년 방송대 영어영문학과 졸업을 앞두고 있다.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곧장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16세 때 방송대 신입생이 됐기 때문. 또래들이 고교에 다닐 때 그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대안학교 보조교사로 일하며 사회 경험을 쌓았다.

이군이 방송대에 대해 알게 된 건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만난 한 선배를 통해서였다. 처음 방송대 진학을 결심했을 때 주변에선 ‘나이 많은 사람들만 가는 학교 아니냐’며 만류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앞으로 뭘 하더라도 영어 구사 능력은 필수일 것’이란 생각에 영어영문학 전공을 택했다. 다행히 학교 생활은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지난해엔 건강이 나빠진 어머니의 요양을 위해 온 가족이 울릉도로 이사했지만 학업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교내 커뮤니티를 통해 만난 선후배들은 이군의 시야를 한층 넓혀줬다. “주경야독하는 직장인, 육아와 학업을 병행하시는 주부 등 다양한 이들을 알게 되며 ‘삶엔 저마다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됐습니다.”

그는 취업 문제도 일찌감치 해결했다. 문화재청 산하기관인 문화유산국민신탁에 채용돼 현재 울릉도 내 울릉역사문화체험센터에서 근무하며 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있다. 그의 주된 임무는 도내 도동리 일본식 가옥(등록문화재 제235호) 등 신탁 등록 문화재 10여 점을 관리하는 것. “내년 말까지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근무하고 졸업 후엔 다른 분야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요즘은 법 쪽에 관심이 생겨 법학전문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입니다.”

이군에게 방송대는 '더없이 훌륭한 인생 길잡이'다. "대학 졸업 이력만으로 제 진로가 결정되진 않겠죠. 원하면 얼마든지 다른 공부를 시작할 수도, 전공을 살려 취업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전 아직 어린 만큼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좀 더 탐색하고 싶어요. 방송대에서 공부하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까진 못 했을 겁니다."

옥대경 불어불문학과 3년, "동기생 어머니와 경쟁하듯 학구열 불태우죠"

옥대경(24)씨는 프랑스 유학파였던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15년을 살다 왔다. "한국어보다 프랑스어가 훨씬 편하다"는 그가 하필 불어불문학과에 진학한 이유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서'. "일상 대화야 문제 없죠. 하지만 대학 강의까지 따라갈 자신은 없었어요. 한마디 끝날 때마다 '다시 설명해주세요'를 연발할 게 뻔했거든요. 방송대 수업은 동영상 강의 형태로 진행돼 원하는 만큼 돌려보고 복습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그는 교내에서 '모자(母子) 재학생'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어머니 역시 아들과 같은 해 방송대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다. 한국이 모국이면서도 외국처럼 낯선 아들의 한국 생활 적응을 돕기 위해 아들과의 동기 동창 생활을 자처한 것. 실제로 출석 수업에 어머니와 나란히 등장한 그를 본 교수와 동기들은 매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다. "주변에선 어머니와 함께 학교에 다니는 게 불편하지 않느냐고 하는데 전 아무렇지 않아요. 원래 어머니와 전 친구처럼 지냈거든요. 어머니가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면 저도 더 열심히 공부하게 돼요. '학교'란 공통 관심사가 생긴 이후 대화도 늘어 오히려 좋은걸요."

옥씨에게 올 한 해는 유난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고교를 갓 졸업한 신입생이 대거 몰려 왔기 때문. "신입생 환영회 직후 열린 뒤풀이에 참석했는데 12학번 후배들이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프랑스어 회화 스터디 모임을 만들더라고요. 반신반의했는데 학기 시작 이후에도 모임이 꾸준히 이어지더군요. 한국 친구가 많지 않은 저로선 후배들의 학구열이 반갑더라고요. 요즘은 강사 역할을 맡아 후배들의 공부를 돕고 있습니다."

요즘 옥씨는 "방송대가 확실히 젊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전엔 30대 이상인 분이 제법 많았는데 올해부터는 분위기가 확 달라진 느낌이에요. 우리 학과 신입생 중엔 프랑스 유학 준비생도 꽤 있죠. 자기 목표를 확실하게 갖고 방송대를 찾는 젊은이가 늘어난 점은 무척 고무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