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도심에 구세군의‘동정(同情)남비’가 등장했음을 알린 조선일보 기사(1938년 12월 22일자).

찬 바람 매섭던 1928년 12월 21일. 경성 거리 곳곳에 세 다리를 세워 매달아 놓은 별난 냄비가 나타났다. 구세군 조선 본영(本營)에서 "닥처오는 동절(冬節)에 굶줄이는 사람들에게 량식과 의복을 도와주기 위하야" 이 땅에 첫선 보인 '자선와(慈善鍋·자선냄비)'였다(1928년 12월 16일자). 오늘날과 거의 다름없는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쓴 구세군 사관(士官)들은 딸랑딸랑 손종을 흔들며 동정금(同情金)을 넣어 달라고 행인들에게 호소했다. "수달피 외투에 깁숙이 무친 배부른 신사의 던저 주는 하치안은 잔돈푼과 여우가죽털 목도리에 포근이 싸인 돈잇는 안악네의 내여미는 동전푼이" 냄비에 쌓였다(1933년 12월 22일자).

매년 12월이면 "번쩍이는 일류미네이�V(illumination·전등불빛)의 환광(幻光)과 상가의 번영을 도라보지도 안코, 가두 한 모퉁이에 서서 라팔을 불며 종을 치면서 불으짓는 제복의 구세군"이 '동정남비' 혹은 '자선남비'로 불린 모금 시설 앞에 서 있는 모습은 경성 거리 연말 풍경의 하나가 됐다(1934년 12월 27일자). 근대의 물결과 함께 가난한 이웃을 보살피려는 외래 종교의 자선 활동이 뿌리내린 것이다.

1920~30년대에 개신교 계열의 기독교청년회는 연말이면 동정상(同情箱·모금함)을 들고 거리에 나갔고(1928년 12월 22일자), 경성교회단체연합회 등은 '동정대(同情袋·동정봉지)'를 집집마다 나눠 주며 모금했다(1937년 12월 1일자). 이런 방법에 견주면, 이웃의 굶주림을 직접 떠올리게 하는 취사도구를 내세운 자선냄비는 훨씬 큰 호소력이 있었던 듯하다. 조선일보는 "한 푼의 동정이나 한 술의 동정쯤이야 못하는 일이 아니요, 안 하는 일일 것"이라며 "하지 안는 동정을 하기 쉽게 긔회를 맨드는 것이 구세군의 남비"라고 했다(1936년 12월 22일자). 자선냄비로 모은 돈은 빈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데 집중적으로 썼다. 구세군은 "일반 빈민에게 매일 50명에 한하여 쌀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하고 "나무가 업서 지어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국밥을 지어" 먹게 하였으며(1928년 12월 22일자) 빈민들에게 따뜻한 떡국을 끓여 먹이기도 했다(1938년 12월 22일자).

초기의 자선냄비 모금액은 지면에서 찾기 어렵지만, 1936년 연말엔 728원(현재 가치로 약 1450만원)이었고(1937년 1월 22일자), 1938년 겨울의 모금액은 921원 11전(약 1840만원)이었다고 기록돼 있다(1939년 1월 24일자). 그렇게 시작된 자선의 싹은 자라고 자라 2011년 자선냄비 총모금액은 48억여원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