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그는 한결같다. 디자이너가 재단해 준 슈트를 입고서 '젓지 않고 흔들어' 만든 마티니를 마시며 '애스턴 마틴' 차(車)를 몰고 다닌다. 악당들을 혼내주다가 가끔씩 위험에 빠지긴 하지만, 괜찮다. 권총'월터 PPK'가 그를 지켜주니까. 어딜 가도 아름다운 여자가 꼬이는 남자이지만, 그것도 괜찮다. 그는 거칠면서 신사적이고, 능글맞으면서 섹시하니까. 그의 이름은 본드, 제임스 본드다.
제임스 본드의 영화 '007시리즈'가 50주년을 맞았다. 50주년 기념작이자 시리즈의 23번째 작품인 '007 스카이폴'이 한국에서 26일 개봉했고 007 제작사는 10월 5일을 '글로벌 제임스 본드 데이'로 정해 각국에서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했다. 5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본드의 매력은 대체 뭘까. 남자들은 부러워하고, 여자들은 갖고 싶어하는 제임스 본드의 스타일을 탐구해보자. 단, 당신의 지갑과 신변의 안전은 책임지지 않는다.
차
본드가 가진 것 중 남자들이 가장 탐내는 것은 '본드걸'도, 턱시도도 아니다. 바로 그의 차들. 시리즈에 등장한 자동차는 본드와 악당의 것을 모두 포함해 160대가 넘는다. 시리즈 1편 '살인번호'(1962)에 나온 크라이슬러 선빔 알파인부터 벤틀리 마크 4(위기일발), 도요타 GT 2000(두 번 산다), 로터스 에스프리 S1(나를 사랑한 스파이), BMW 750iL(네버 다이) 등 다양한 국적의 차들이 등장했다. 그래도 본드카라면 단연 '골드 핑거'(1964)에 처음 나온 '애스턴 마틴 DB5'. 최고 속력은 시속 292㎞, 제로백(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시간) 8.1초로 당시 최고 성능을 자랑하는 수퍼카였다. '스카이폴'에선 옛 디자인 그대로, 번호판까지 최초 등장 때 달고 있었던 'BMT 216A'를 달고 나타난다.
'본드카'는 얼마를 주고 살 수 있을까. '골드 핑거'와 '썬더볼'(1965)에 나온 애스턴 마틴 DB5는 2010년 런던 경매에서 412만달러(약 46억원)에 낙찰됐다. 회전식 번호판, 방탄장치, 타이어휠 등의 장치를 갖춘 이 자동차는 여전히 제 기능이 모두 작동했다고 한다.
술
"젓지 말고, 흔들어서."("Shaken, not stirred.")
본드는 칵테일 마티니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본드의 술은 대대로 보드카 베이스의 드라이 마티니였다. 원작 소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1956)에 나온 이 말은 64년 영화 '골드핑거'에 처음 등장하면서 본드의 상징이 된다. 플레밍의 원작에 따르면 본드 마티니는 진 브랜드인 플리머스와 보드카, 그리고 릴레트(프랑스 와인 브랜드)를 섞어 젓지 않고 흔들어서 만든다.
본드와 본드걸, 본드카는 바뀌지만 마티니는 매편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최근 개봉한 '스카이폴'에서 본드는 PPL(제작비 지원에 따른 간접광고) 때문에 하이네켄 맥주를 마시기도 하지만 마카오 카지노에선 그래도 마티니를 마신다. 여자 바텐더가 마티니를 흔들어서 주자 본드는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완벽하군."
여자
본드의 첫 여자는 시리즈 1편 '살인번호'에 나온 스위스 배우 우르슬라 안드레스 . 흰색 비키니를 입고 허리춤에 단검을 찬 채 바닷가에 나타난 그를 보고 넋을 잃은 건 본드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젖은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리고 간절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보고 있으니 오죽했을까. 이 한 장면 덕분에 안드레스는 아직도 최고의 '본드걸'로 꼽힌다. 남성 관객의 열화 같은 성원에 힘입어 이후 매편 섹시한 여성들이 등장해 앞다퉈 본드를 유혹한다.
50년간 60여명의 본드걸이 등장했기 때문에 본드의 여성 취향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 초기에는 풍만한 몸매의 백인 여성들이 주를 이뤘지만, '두 번 산다'(1967)엔 와카바야시 아키코와 하마 미에 등 일본 여배우들이, '죽느냐 사느냐'(1973)엔 흑인 여배우 글로리아 헨드리가 출연한다. '네버 다이'(1997)에선 중국계 배우 양자경까지 나온다. 어쨌거나 이들 모두 섹시한 건 기본이고 악독과 청순을 오가며 다양한 매력을 보여준다. 그래 봤자 본드와 잠깐 인연을 맺고서 사라질 뿐, '영원한 본드의 여자'는 없다.
역대 본드의 패션 분석
배우따라 유행따라… 본드 스타일도 '변신'
남자들에게 007시리즈는 멋내기의 교과서 같은 영화다. 과격한 임무를 수행할 때도 언제나 말쑥한 제임스 본드. 멋쟁이가 되고 싶은 남자들의 롤모델 역할을 해온 그의 스타일이 50년간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봤다.
초대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는 전형적인 영국식 슈트를 입고 007시리즈에 출연했다. 단단해 보이는 어깨, 잘록한 허리, 로프트 숄더(소매와 어깨가 만나는 곳이 밧줄을 끼워넣은 것처럼 볼록하게 올라오는 모양) 등이 특징이다.
코너리가 출연한 2편 '위기일발'(1963)에서 단검, 탄환, 금화 등을 숨긴 가방이 등장한 이후 한국에서 '007 가방'은 사각형 브리프케이스의 대명사가 됐다. 영화에 등장한 가방을 만든 영국의 잡화 브랜드 '스웨인 오드니 브리그'는 홈페이지를 통해 "똑같은 가방을 지금도 판매하며 가격은 1675파운드(약 290만원)"라고 소개하고 있다.
6편 '여왕폐하 대작전'(1969)에만 출연한 2대 본드 조지 라젠비는 가슴에 구불구불한 프릴 장식이 달린 셔츠를 입은 유일한 본드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보기엔 다소 과장돼 보이는 디자인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본드걸, 악당까지 포함한 '007시리즈 최고의 옷차림' 10가지 중 하나로 3대 본드 로저 무어가 10편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에서 입었던 재킷을 꼽았다. 옅은 갈색의 이 재킷은 견장, 외부로 돌출된 주머니처럼 사파리 재킷을 닮은 디자인이 특징이다.
무어는 자신의 마지막 007 영화인 14편 '뷰 투 어 킬'(1985) 등 다른 작품에서도 옅은 갈색 재킷을 즐겨 입었다. 이를 두고 본드의 옷차림만 전문으로 다루는 해외 인터넷 사이트는 "나이 들어가는 무어에게 잘 어울리는 색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14편 개봉 당시 58세였던 무어는 현재까지 '최고령 본드'다.
4대 본드 티머시 돌턴은 1980년대 개봉한 15·16편에 출연했다. 1980년대는 사이즈가 크고 직선적인 '파워 룩'이 유행하던 시대다. 돌턴 역시 어깨가 크고 각진 재킷을 입고 영화에 등장했다. 이런 흐름은 1990년대까지 이어져 5대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은 17편 '골든아이'(1995)에서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재킷을 입었다.
23번째 007 영화 '스카이폴'의 개봉을 앞두고 화제가 됐던 소식 중 하나는 본드의 의상을 유명 디자이너 톰 포드가 제작한다는 것이었다. 톰 포드의 양복은 몸에 꼭 맞는 재단에, 깃의 꼭지가 뾰족하게 솟아오르는 '피크드 라펠' 같은 장식적 요소를 더해 섹시한 느낌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6대 본드 대니얼 크레이그는 자신의 첫 작품인 21편 '카지노 로얄'(2006)에서 새로운 본드의 탄생을 예고했다. 볼펜 폭탄 같은 비밀 무기를 썼던 선배 본드들과 달리 울퉁불퉁한 근육을 드러내고 맨몸으로 부딪치며 야성미를 과시했다. 올해 개봉한 '스카이폴'에서도 크레이그는 완벽하게 갖춰 입은 슈트로도 감출 수 없는 섹시함을 뽐내고 있다.
음악
007시리즈의 OST는 팝 음악사의 중요한 페이지이다. 매트 몬로부터 루이 암스트롱, 폴 매카트니, 듀란듀란, 티나 터너, 마돈나 등을 거쳐 아델까지 당대 최고의 팝 스타들이 댄스·록·발라드 등 다채로운 음악으로 영화 장면을 수놓았고, 그때의 음악·문화 흐름을 담았다.
셜리 배시의 '골드 핑거'(1964년) 등 1960년대 노래들은 오케스트라 스타일의 장중한 반주가 이끄는 세미 클래식풍. 루이 암스트롱의 '위 해브 올 더 타임 인 더 월드'(여왕폐하 대작전·1969)서부터 가수 개성이 짙어졌다. 폴 매카트니의 '리브 앤드 렛 다이'(죽느냐 사느냐·1973)는 느릿한 파트와 빠른 간주를 불규칙적으로 교차시키는 편곡으로 지금도 '시대를 앞서갔던 최고의 영화주제가'로 꼽힌다.
80년대 들어 영화 이상으로 독자적인 히트곡이 된 주제가들이 잇달아 나왔다. 신예 시나 이스턴을 스타로 끌어올려준 웅장한 발라드 '포 유어 아이즈 온리'(1981), 빌보드 정상에 오른 듀란듀란의 대표곡 '뷰 투 어 킬'(1985)이 대표적인 경우. 90년대 이후 007주제가는 날카롭고 강렬해졌다. 셰릴 크로의 '투모로 네버 다이스'(네버다이·1997), 록 넘버인 크리스 코넬의 '유 노 마이 네임'(카지노 로얄·2006) 등이 대표곡. 마돈나는 '어나더 데이'(2002)에서 일렉트로닉 댄스곡을 주제가로 불러 화제가 됐다. 아델의 '스카이폴'에 이르러 007 주제가는 레트로(복고주의) 열풍의 영향을 받아 웅장한 오케스트라 스타일 반주에 코러스까지 동원했다.
50년 동안 이어진 주제곡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한 건 '띵디리딩딩 딩딩딩딩'하는 신경질적 기타음으로 시작하는 존 배리 작곡의 제임스 본드 테마. 음악평론가 송기철씨는 "50년이 넘도록 듣는 이들에게 긴장과 스릴을 안겨주는 생명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최고의 007 노래"라고 했다.
총
"손금으로 암호화됐죠. 당신만 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살인 기계라기보단 당신의 개인적 표현에 가깝죠."
본드의 무기를 책임지는 Q는 '스카이폴'에서 손금을 인식하는 권총을 본드에게 건네주며 이렇게 말한다. 최초의 시리즈 '살인 번호'에서도 같은 장면과 대사가 등장한다. 이 권총은 '발터(Walther)PPK'다. 1931년 등장한 이 모델은 분해가 간단하고 사용이 편리해 큰 인기를 모았다. '콜트 오피셜 폴리스' '스털링 SMG' 'MAC-10' 등 다양한 무기들이 시리즈에 등장했지만 본드가 가장 많이 사용한 '발터PPK'가 007을 상징한다. 남성 잡지 '스터프'에 따르면 현재 기술로 손금 인식 권총을 만들 수 있지만 세상에 나오긴 힘들 것이라고 한다. 총을 사용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스파이는 물론, 일반인들도 사용하길 꺼릴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