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운주사는 민초들이 이상향(理想鄕)을 꿈꾸며 돌부처 천 개를 세웠다는 천불천탑의 절이다. 나란히 누운 한 쌍 와불(臥佛)이 일어서는 날 새 세상이 열린다 했다. 노벨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가 2001년 가을비 내리는 운주사를 찾았다. 비에 젖은 와불을 보며 20년 만에 시를 썼다. '가랑비는 가을 단풍잎으로 구르고/ 길게 바다로 흘러/ 시원(始原)으로 돌아간다/ 두 와불은 비에 얼굴을 씻고/ 하늘을 응시한다/ 또다른 시공간을 꿈꾼다/ 세상이 벌써 전율한다.' 가을비는 시심(詩心)을 부른다.

▶헤밍웨이 소설에서 비는 탄생과 죽음을 암시한다.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캐서린은 "빗속에서 내가 죽어가는 모습이 보인다"고 두려워했다. 그녀는 아기를 낳다 죽고 헨리는 하염없이 비 내리는 길을 걸어간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는 가을비에서 옛 사랑을 떠올린다. '비는 아침까지 내렸다. 눈에도 안 보이게 가늘었다. 웅덩이 물무늬와 낙수 소리로 비가 온다는 걸 알았다.' 가을비는 떠나보낸 사랑이다.

▶쇼팽은 전주곡 15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빗방울 전주곡'이라고 불렀다. 왼손 반주가 음울하게 반복하는 음이 땅에 떨어졌다 튕겨 오르는 빗방울 같다. 폐결핵을 앓던 쇼팽은 1838년 늦가을 연인 조르주 상드와 지중해 섬 마요르카에 갔다. 그러나 날씨도 몸도 좋지 않았다. 쇼팽은 비 오는 날 적막한 수도원에서 혼자 빗소리를 들으며 곡을 썼다. '빗방울 전주곡'엔 가을비 같은 남자의 고독이 스며 있다.

▶클로드 를루슈 영화 '남과 여'에서 홀아비 카레이서 장과 과부 시나리오 작가 안이 해변도시 도빌에서 마주친다. 파리행 열차를 놓친 안이 장의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가을비가 쏟아진다. 죽은 남편과 아내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둘은 와이퍼로 비를 쓸어올리듯 추억을 말했다. "다바다바다…" 듀엣곡 '남과 여'가 둘의 사랑을 예고했다. 가을비는 우연한 만남마저 감상적 사건으로 만든다.

▶박용래는 봄비가 '유리병 속으로 파뿌리 내리듯 내린다'(고월·古月)고 했다. 여름비는 '귓전에 맴도는 목놓은 소리, 상아빛 채찍'(장대비). 가을비는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긴 밤 모과차 마시며 가을 빗소리'(모과차)라 노래했다. 봄비는 새뜻하고 여름비는 장쾌하고 가을비는 차 한잔을 부른다. 어제 한나절 비 오고, 추워졌다.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떠나가는 것일까. 간이역 대합실 같은 데 앉아 따끈한 모과차를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