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텔방, 아틀리에로 변신
제과업체서 아트밸리 조성
화가·조각가·국악인들에 창작 공간으로 무료 제공
갤러리로 꾸며 아트쇼도
양주시도 모텔 두곳 사들여 위탁경영 맡겨… 총 7개로
"낯섦이 아이디어 자극해"
경기도 송추에서 기산유원지로 이어지는 39번 국도 초입. 말머리고개까지 이어지는 4㎞ 도로를 따라 소위 '러브'호텔로 불리는 모텔 10여개가 늘어서 있다. 한데 그중 5개는 모텔이 아니라 예술가들이 작업하는 아틀리에다. 외관은 영락없는 모텔이지만 조각가와 화가들, 국악인들이 들어와 살거나 작품활동을 하는 작업실로 활용되고 있다. 요즘도 차를 몰고 주차장으로 들어와 빈방을 찾다가 화들짝 놀라 사라지는 손님들이 심심찮게 있다고 한다.
서울 외곽의 모텔촌으로 유명했던 송추 인근 지역을 예술가들이 하나 둘 점령(?)해가고 있다. 지난 2009년부터 일부 모텔이 예술가들의 레지던스(residence) 창작공간으로 바뀌더니 현재는 5개 모텔에 20명의 조각가와 1명의 화가 작업실이 만들어졌고, 국악공연장(우리가락 배움터)과 사무 공간까지 갖춘 예술촌으로 바뀌었다. 인근 장흥유원지가 '아트밸리'로 출발했다가 계속 들어선 모텔들로 인해 모텔촌으로 바뀌어버린 것과 대조를 이루는 움직임이다. 비록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으로 용도는 달라졌지만, 건물 외관은 바뀐 게 없다. 기존 모텔들 이름은 아틀리에 이름으로 써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예술적'이었다. 그렇게 피카소, 모모, 준, 테스, 리치 등의 모텔이 '스튜디오 준', '아틀리에 피카소'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니 모텔 시절의 프런트 내실과 CCTV, 방마다 있던 조명시설과 에어컨을 그대로 둔 채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입구의 '청소년 고용금지업소' 스티커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입주 조각가인 최성철(49)씨는 "모텔이라는 낯선 공간이 작가들의 작업 공간으로 바뀌면서 그 '낯섦'이 아이디어를 자극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크라운해태제과가 이 지역 부지 100만평을 '송추아트밸리'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산재해 있던 모텔을 매입한 것이 모텔이 아틀리에로 변신하는 계기가 됐다. 크라운해태제과 측은 원래 골프장 부지로 80년대부터 갖고 있던 땅이지만, 중도에 계획을 바꿔 조각 공원과 산책로, 전시시설, 공연장을 갖춘 지역으로 변모시킨다는 계획이다.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은 기존 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는 방침이어서 모텔 건물에도 일절 손을 대지 않고 있다. 빈방이 많다보니 지난해 일본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에게 무료로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한때 12명이 살았으나, 현재는 두 명만 남아 있다. 입주기간에 제한이 없어 장기 입주한 작가들이 많은 편. 최근에는 양주시청이 매입한 모텔 두 곳도 위탁 경영을 맡기로 해 부근에 들어선 모텔형 아틀리에는 모두 7개가 됐다.
작년 8월에는 피카소 모텔을 갤러리로 꾸며 '러브호텔 아트 쇼 2011'을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 모텔 객실과 복도 인테리어 모두 그대로 둔 채 작가들이 침대, 샤워실, 화장대 등을 이용해 작품을 설치해 관람객들에게 선보였다. 21명의 작가들이 상주해 있다보니 서로 작품 활동에 자극도 되고 의견교환도 쉽게 이뤄진다.
이곳에 입주해 있는 화가인 유둘(32)씨는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국내의 어느 창작 레지던스보다 작가들 간의 교류가 활발하다"며 "나의 경우 이전에는 조각을 몰랐는데 조각가 선배들에게 조금씩 배워서 지금은 조각 작업에도 손을 대고 있다"고 말했다.
아트밸리라는 이름으로 자주 입에 오르내리다보니 한때 러브호텔촌(村)으로 유명했던 이곳의 명성은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는 몇몇 모텔들은 은근히 자신들의 모텔도 매입해줬으면 하는 눈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