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동부 벵가지에서 미국 영사관에 대한 로켓포 공격이 벌어져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주(駐)리비아 미국 대사를 비롯한 미국 관리 4명이 숨졌다. 리비아 시위대 수십명은 사건 발생 당시 총으로 무장한 채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가 이슬람을 모독했다며 공중으로 총을 쏘며 영사관으로 몰려들었다. 스티븐스 대사는 영사관 내부에 찬 연기에 질식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폭도들의 공격이 격화하자 영사관 건물에서 나와 승용차로 이동하던 중 로켓포 공격을 받았다는 보도도 나왔다.

리비아 정부는 11일 스티븐스 대사의 피살 배후로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를 지목했다. 9·11 테러 11년이 되는 날, 이슬람 비하 영화에 대한 반미 시위로 도심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알카에다가 그동안 계획해온 미국에 대한 테러를 실행했다는 것이다.

이집트 카이로 주재 미국 대사관 앞에서 11일 시위대가 무함마드를 모독하는 내용의 미국 영화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던 중 대사관 담장을 넘어 안뜰에 걸려 있던 대형 성조기를 낚아챈 뒤 담장 위에서 찢고 있다. 문제의 영화는 이스라엘 출신 미국인이 제작한 ‘무슬림의 순진함’으로 무함마드를 소아 성애자로 묘사하는 등 이슬람교를 비하하는 내용이다.

실제로 지난 6월 벵가지 주재 영국 영사관 인근에서 알카에다 무장요원이 도미니크 아스키스 대사를 노리고 차량에 로켓포를 발사해 경호원 두 명이 부상을 입었다. 표적이나 장소, 사용된 무기와 방식이 이번 미국 대사 피살 사건과 매우 유사하다. 당시 미국 영사관도 표적이었다고 영국 더타임스는 보도했다. 벵가지에서 불과 250㎞ 떨어진 데르나에 무장요원 3000여명이 훈련할 수 있는 알카에다의 테러 훈련 캠프가 들어섰다는 보도도 있었다.

리비아 내전 당시 흘러들어온 알카에다 일당이 이전부터 9·11테러 11주년이 되는 날을 목표로 공격을 계획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시위대의 틈에 "중화기로 무장한 전투 요원들"이 섞여 있었으며 인근 농가에서 로켓포를 장전해 정확히 영사관을 노려 포격했다고 밝혔다. CNN 등 미국 언론은 원래 트리폴리에 주재하는 미국 대사가 벵가지를 방문한 날 공격이 이뤄진 점을 들어 계획설을 언급했다.

(오른쪽 사진)리비아 벵가지의 미국 영사관에서 11일 로켓포 공격을 받은 후 의식을 잃은 스티븐스 대사로 추정되는 남자를 현지 직원들이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있는 모습이 공개됐다. 이탈리아 일간 코리에레 델라세라가 사진 속 인물이 스티븐스 대사라고 보도했다.

숨진 스티븐스 대사는 또한 리비아 내전 초기부터 시민군 편에서 나토(NATO)의 개입을 강력히 요구했었다. 따라서 카다피를 추종하는 카다파 부족이나 무장 세력이 스티븐스 대사를 표적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AFP통신 등이 전했다.

무함마드 메가르예프 리비아 국민회의 의장은 12일 "어제 사건은 9월 11일 벌어졌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며 "리비아 정부는 이 땅이 겁쟁이들의 복수전으로 물들게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리비아에서는 지난해 내전 당시 널리 유통됐던 총기 등 무기가 회수되지 않고 여전히 군벌·부족·시민군 손에 있어 치안이 불안한 상황이다. 대규모 시위가 유혈사태로 벌어질 가능성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이슬람권의 분노는 반미(反美) 감정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11일 주로 급진 이슬람주의 정파 '살라피' 지지자들로 구성된 시위대 2000여명이 미국 대사관에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이슬람주의 조직 무슬림형제단은 오는 금요일 100만명 시위를 조직하겠다고 밝혔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도 영화를 비판하며 보복을 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