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기사기획 에디터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없다"는 노다 일본 총리 발언에 분개한 독자 김원태씨가 소장하던 일본 책을 보내왔다. 요시다 세이지라는 일본인이 1972년에 쓴 육성 수기(手記)였다. 요시다는 시모노세키에서 일제의 노동자 징발 기구인 노무보국회(勞務報國會) 동원부장을 3년여 동안 지냈다. 그는 수많은 조선인을 강제 연행해 전쟁터로 보냈고, 그때의 만행(蠻行)을 참회하려고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이라는 책을 썼다.

요시다의 증언은 현장을 보는 듯 세밀하고 구체적이다. 그는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아 한반도까지 넘어와 조선인을 잡아갔다. 경찰 호송차를 앞세우고 경북 영천 일대를 누비며 젊은 남성을 연행했다는 것이다. 당시 요시다 패거리는 조선인 징발을 '사냥'이라고 불렀다. 아닌 게 아니라 아무 집에나 들어가 사람을 끌고 가는 행태가 인간 사냥과 다를 게 없었다.

그는 조선인 남성 사냥엔 별 죄책감이 없었다고 했다. 전쟁 중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 요시다도 여성을 군 위안부로 징발하는 일은 '혐오감'이 들었고, '창피하고 더럽게' 느꼈다. 전장(戰場)의 위안부가 얼마나 유린당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본군) 1개 중대가 줄 서서 기다리면 위안부는 20~30명씩 상대해야 한다더라"고 썼다.

그에게 조선인 위안부 '사냥' 지시가 떨어진 것은 1944년 봄이었다. 이해 4월 3일 "하이난도(海南島) 주둔 황군(皇軍) 위문(慰問)을 위한 조선인 여자 정신대(挺身隊) 100명을 징발하라"는 명령서가 내려왔다. 대상은 18~35세, 월 급여 30엔에 임신부만 아니면 기혼자도 괜찮다고 적혀 있었다.

30엔이면 적지않은 돈이었지만 이걸 바라고 성노예를 자원할 조선인 여성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강제로 끌고 가면 시끄러워질 수 있었다. 요시다와 부하들은 사기를 치기로 했다. 위안부가 아니라 세탁·청소 등을 하는 잡역부(雜役婦)를 뽑는 것처럼 위장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조선과 가까운 쓰시마(對馬島)의 육군 병원에서 1년간 일할 잡역부를 모집하는 것처럼 내세운다는 각본을 짰다.

요시다의 책엔 '위안부 사냥' 수법이 4개 장(章)에 걸쳐 기록돼 있다. 경찰서 형사까지 가세해 4명으로 구성된 요시다 팀은 시모노세키의 조선인 징용자 부락을 돌면서 사냥에 나섰다. 월급 30엔에다 쓰시마 병원 근무를 선전하자 조선인 여성들은 혹하고 넘어왔다. 다들 그 돈을 모아 조선 땅에 돌아가겠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요시다 팀은 일주일 만에 할당된 100명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18세 미만도 10여명 있었지만 지침에 따라 나이를 18세로 고쳐 적었다.

요시다는 "조선 민족에 대한 범죄를 나는 비겁하게도 30년간 은폐해왔다"고 뒤늦은 고백을 사죄했다. 그는 일본 언론을 통해서도 자기 만행을 증언했지만 일본 정부는 거짓말이라며 덮었다. 요시다의 위안부 모집은 총칼 대신 '덫'을 썼다는 차이뿐 명백한 인간 사냥이었다. 이 책 한 권만으로도 일제의 위안부 강제 연행은 입증되고도 남는다. 총을 들이대지 않았으니 강제성이 없었다고 우기는 일본 정치인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요시다가 모집한 조선인 위안부 100명은 4월 10일 전쟁터로 떠났다. 이날 시모노세키항엔 조선인 처녀와 가족으로 붐볐다. '사냥'당한 여성들은 자신을 맞이할 험난한 운명도 모른 채 돈 벌어 고향에 돌아갈 희망으로 웃음꽃을 피웠다. 오후 1시, 기선(汽船) 두 대가 조선인 여성 100명을 태우고 떠났다. 목적지는 쓰시마의 병원이 아니라 남중국해 전선의 일본군 기지였다. 요시다는 부두에서 그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