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국립중앙도서관·조선일보·교보문고가 주최하는 '길 위의 인문학' 답사단 80여명이 도착한 곳은 전남 해남의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 선생 고택이었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미음(ㅁ)자 형태의 건축양식을 가진 녹우당(綠雨堂)은 효종이 스승인 고산을 위해 수원에 지어준 집이라고 한다. 그 집 일부를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왔다고 하니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다.

삼전도의 굴욕을 전해 들은 고산이 세상을 등지며 선택했다는 보길도까지는 땅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이동을 했다. 고산은 그곳 부용동에 못을 파고 세연정(洗然亭)을 지었다.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다는 판석보는 양옆에 판판한 돌을 세우고 위에 뚜껑을 덮어서 속이 비어 있는 형태라고 한다. 건조할 땐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하니 고산의 실학 정신을 엿볼 수가 있다.

강사로 나선 칼럼니스트 조용헌씨는 근심, 걱정을 줄이는 것이 정원의 역할이며 그래서 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해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공자도 지자(智者)는 요수(樂水)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연정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치열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지내야만 했던 고산도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속에서 말년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강진 다산초당을 찾은‘길 위의 인문학’답사단이 한형조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다.

25일은 다행히 날이 개었다. 아침부터 설레던 마음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대감은 곧 다산 선생의 불우한 일생과 맞닥뜨리면서 안타까움으로 변해갔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아침에 일어나도 할 일이 없고 유배 온 몸이라 세상도 꼴 보기 싫다. 그래서 문을 닫고 지낸다. 찾아올 손님도 없으니 이불을 일찍 개어서 뭐하나?'라는 시를 지을 만큼 다산이 강진 유배 초기, 힘든 시기를 보냈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다산은 '사의재(四宜齋)'라는 방을 만들어 생각을 정갈하게 하고 용모는 단정하게, 말은 신중하고 행동은 절도 있게 하겠다는 뜻을 품는다. 그런 자세로 목숨을 보존한 뒤에 그는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마과회통(麻科會通) 같은 다양한 책들을 집필하게 된다.

답사에 참가한 김치경(67)씨는 "다산이 오랜 유배생활 덕분에 후세에 많은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게 묘한 아이러니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