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서는 그림과, 글씨와, 노래와 시(詩)가 인생의 전부다."
올해 우리 나이 아흔아홉 살의 한묵 화백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았고, 건망증도 심했다. 그러나 평생의 업(業)인 그림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더니 "나는 그림 한 가지밖에 모른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한국 기하추상의 거목(巨木)인 한 화백이 오는 22일부터 내달 16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개인전을 연다. 2003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선정 기념전 이래 9년 만의 개인전이다. 한 화백의 도불(渡佛) 51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 전시에는 모두 40여 점의 그림이 나온다. "한 화백이 내년에 백 살이 되는지라,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개인전을 열고 싶었다"는 것이 부인(80)의 말. 정작 한 화백 본인은 "나는 나이 같은 것엔 별로 관심이 없다. 내가 몇 살이 되었든 나는 나다.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도 크게 없다"면서 나이에도, 전시에도 무덤덤해했다.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 출신으로 6·25 때 종군화가로 활동했던 한 화백은 1950년대엔 전쟁의 단상을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그렸다. 1961년 '예술의 이상향' 파리로 떠났고, 이후 파리에 체류하며 점·선·면 등 조형요소를 탐구하는 작품으로 옮겨갔다. 1969년 아폴로11호의 달 착륙에 충격받은 후엔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천착, 대형 화면에 우주의 에너지를 가득 담은 그림을 그렸다. 작년엔 대한민국예술원상(미술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0년대 초 파리에서 공부했던 오원배 동국대 교수는 "당시 파리의 한국 화가들에게 한 화백은 정신적 지주였다. 홍익대 교수직까지 버리고 '더 자유로운 예술'을 찾아 파리로 온 그분의 투철한 작가정신, 검소한 생활 등이 후배 화가들에게 귀감이 됐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야수파적 터치가 묻어나는 1950년대 초기작부터 원(圓)과 소용돌이로 화면을 꽉 채운 2000년대 작품까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 어떤 '힘'에의 도전"이라고 이야기해 온 한 화백 화업(畵業) 60년을 조망할 수 있다. 전시와 함께 작품 100여 점이 수록된 화집도 마로니에북스에서 출간된다. 한 화백 생애 첫 화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