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서 박진감 넘치는 음악과 함께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장충체육관입니다"라는 아나운서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 한마디에 온 국민이 라디오와 흑백 TV 앞으로 바짝 다가앉던 시대가 있었다. 먹고살기 힘들고 마땅히 즐길 것도 없던 시절, 장충체육관에서 펼쳐지는 짜릿한 승부는 더없는 오락이자 축제였다. '박치기 왕' 김일, '백드롭 명수' 장영철, '당수 귀신' 천규덕의 프로레슬링 경기라도 있는 날이면 동네 만화 가게는 꼬마 손님들로 미어터졌다.

▶어느 해 장충체육관에서 연세대고려대 농구 경기가 열렸다. 아나운서는 스포츠 중계로 이름을 날리던 임택근이었다. 그는 마이크를 잡자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이역만리…"라고 해버렸다. 그는 "해외에서 현장감 있는 중계로 국민을 울리고 웃겼던 것처럼 경기를 생생하게 전해야겠다는 부담을 갖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회고했다.

▶1966년 프로 복서 김기수가 이탈리아 벤베누티를 물리치고 세계 챔피언이 된 순간은 장충체육관 역사에서 참으로 화려한 페이지 중 하나였다. 주식(主食)이었던 보리쌀 한 가마가 1000원 하던 당시, 링 사이드 입장권이 6000원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나 가난을 운명으로 알고 살아온 한국 젊은이가 66전 66승의 세계 챔피언을 무릎 꿇리는 순간 온 나라가 그간 걸어온 고단한 길을 떨쳐버리듯 열광했다.

▶장충체육관이 들어선 남산 자락엔 명성황후 시해 때 일본군에게 맞서다 순사(殉死)한 훈련대장 홍계훈과 장병들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일제는 이 사당을 허물고 조선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 박문사를 세웠다. 정부 수립 후엔 육군체육관이 들어섰고, 1963년 2월엔 국내 첫 돔 형식 실내 체육관으로 장충체육관이 문을 열었다. 지름 80m에 이르는 돔 철골구조, 야간 경기를 밝히는 조명, 냉난방…. 전에 보기 힘들던 첨단 설비들이 화제였다. 정부가 세종로에 3층 청사를 짓겠다고 하자 언론이 "사방에 널린 판잣집은 어떻게 하고 맘모스 건물부터 지으려 하는가"라고 꾸짖던 시절이었다.

▶장충체육관이 문 연 지 50년 만에 안팎을 두루 뜯어고치는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당시 우리 국민소득은 1인당 80달러였다. 돔 천장 올리는 기술이 달려서 아시아 선진국이었던 필리핀 기술자들이 거들었다고 한다. 필리핀은 세종로에 있는 옛 문화관광부 청사와 미국 대사관 건물을 짓는 데도 참여했다. 그때 우리의 세 배가 넘던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이 지금은 우리 10분의 1 수준이다. 어제 조선일보 1면에 실린 장충체육관 사진을 보며 우리가 걸어온 지난 50년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