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디자인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서비스 디자인이다."

얼마 전 디자인계에서 갑론을박을 벌인 키워드다. '제품 디자인'으로 대표되는 2차 산업 시대가 지나가고 3차 서비스 산업을 디자인하는 게 대세가 될 거라는 얘기다. 제품 디자인의 힘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사람의 경험과 가치 등 무형(無形) 프로세스를 디자인하는 '서비스 디자인'이 메가 트렌드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디자인계의 최대 화두는 '공공디자인'이었다. 2006년 취임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디자인 서울'을 주요 정책 키워드로 내세우면서 건물·거리·공원 등 공공시설을 아름답고 효율적으로 디자인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오 전 시장이 물러나면서 공공디자인 열풍도 한풀 꺾였다.

기존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검진 결과표(왼쪽)를 알기 쉽게 리디자인해 바꾼 것(오른쪽). 어려운 용어 대신 선명하고 쉬운 그래프가 눈에 띈다.

이 빈자리를 대신해 요즘 주목받고 있는 디자인 영역이 '서비스디자인'이다. 말 그대로 '서비스를 디자인한다'는 뜻이다. 제품이나 시설물 같은 '보이는 것'을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의료·교통·관광·통신 등 '보이지 않는' 서비스를 디자인해 사람들의 행동과 습관을 바꾸는 걸 의미한다. 얼마 전 국내에서 '서비스 디자인 네트워크 코리아 콘퍼런스 2012'가 열리는 등 디자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표적 사례는 올 초 디자인진흥원과 디자인그룹 사이픽스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건강검진 결과표를 리디자인한 것이다. '1시간 대기하고 10분 검진받고 2달 기다려 결과표를 받는'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해 프로젝트팀은 기존 건강검진 결과표를 완전히 바꿨다. 각종 의학 용어와 수치는 쉬운 말과 선명한 그래프로 바꿨고, 몸 상태에 대한 소견도 질병에 걸릴 확률로 바꿨다.

결과표가 바뀌자 사람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옛날엔 결과표를 구석에 처박아뒀는데 이번엔 냉장고에 붙여놨다" "운동을 전보다 많이 하게 됐다"는 평이 나왔다. 지난해 초 아파트 전기요금 고지서를 빨간색·노란색 등으로 디자인해 입주민들이 전기 절약을 하도록 유도한 사례도 있다.

서비스 디자인이 가장 활발하게 적용되는 분야는 전문가와 소비자 간 지식 간극이 큰 의료기관. 미국 메이요클리닉은 어린이 환자들을 음악·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채혈 의자에 앉히고, 의사가 초진 환자를 45분 이상 진료하도록 하는 등 전반적인 병원 운영 시스템을 개선한 '진료실 개혁 프로젝트'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미국의 한 디자이너가 의약병 투약 지침을 가독성 있게 디자인해 투약 오류 의료사고를 줄이고 제품 매출을 15%나 끌어올린 것도 성공 사례로 꼽힌다.

'서비스디자인' 유행에 대한 우려도 있다. 한 디자인 전문가는 "과거 공공디자인 열풍이 불었을 때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공공기관 프로젝트에만 매달리다 지금은 다들 손을 놓고 있다"면서 "서비스디자인도 그런 일시적 유행에 그쳐선 안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