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아버지인 안영모 박사(사진 왼쪽) photo 조선일보 DB

기자는 얼마 전 안철수 원장의 부친 안영모(82) 박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안철수를 키워낸 안 박사의 교육법과 안철수 원장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안영모 박사는 부산의 서민동네인 범천동에서 동네병원인 ‘범천의원’을 50년 가까이 운영해 왔다. 안 박사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지난 1963년 빈민촌이나 다름없던 곳에 병원을 세웠고, 의료법이 제정되기 전 다른 병원 진료비의 절반만 받으며 서민들을 진료해 왔다.

직접 가본 ‘범천의원’은 지어진 지 40년도 더 된 낡은 건물답게 세월의 더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안철수 원장 가족은 약 20년 전까지 이 병원 건물 3, 4층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공식 진료가 시작되기 전 시간이었지만 병원 문은 활짝 열린 상태였다. 그 너머로 오래된 집기와 가구 몇 개가 눈에 띄었다. 안영모 박사의 책상은 진료실과 환자용 간이침대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장실’ 문패 같은 건 눈에 띄지 않았다. 홍삼 음료를 사 들고 기다리길 한 시간여, 환자 두어 명의 진료를 마친 안 박사가 마지못해 인터뷰를 수락했다.

학부모 입장에서 안철수 원장의 이력, 특히 학력은 더없이 매력적이다.(안철수 원장은 서울대 의과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마쳤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안영모 박사는 심드렁했다. “자기가 (공부를) 좋아하니까 자꾸 하게 되고, 계속하다 보니 잘하게 된 거지. 그게 뭐 자랑이라고…. 별로 특별할 것도 없어요.”

지난 7월 19일 출간된 안철수 원장의 저서 ‘안철수의 생각’.

 "친구들이 툭하면 놀려댔던 모양"

안영모 박사에 따르면 '아들 철수'는 어렸을 때 별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래보다 한 살 이른 일곱 살 때 초등학교(부산 동성초등)에 보냈어요. 성적은 반에서 중간 정도였지요. 또래보다 어리고 작은 탓에 반 친구들이 툭하면 놀려댔던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겠지요."
   
'초등생 안철수'가 친구들의 괴롭힘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는 '책'이었다. "큰아이가 6학년 때였을 거예요. 하루는 담임 선생님이 '철수가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을 전부 읽었다'고 알려주시더군요. 당시 그 학교 도서관엔 3000권쯤 되는 책이 있었다고 해요. 분야와 관계없이 많은 책을 반복해 읽으며 자연스레 학문에 관한 기초 실력을 쌓게 된 것 같아요."
   
책을 통해 공부의 재미를 알게 된 후부터 안철수 원장의 성적은 가파르게 올랐다. 전교 20등 안팎이던 중학교 시절을 거쳐 고교 2년 때 마침내 전교 1등을 기록했고 이후 한 번도 왕좌를 내어주지 않았다. 이와 관련, 재밌는 일화도 있다. "큰아이가 고등학교 입학 후 치른 첫 시험에서 전교생 600명 중 16등을 했어요. 그런데 성적 발표 직전 제게 그러더군요. '아버지, 우리 학교는 전교 15등한테까지만 성적 우수상을 주거든요. 16등 한 아이는 얼마나 억울할까요?' 공교롭게도 본인이 그 '억울한 아이'가 된 거지요."(웃음)
   
안철수 원장은 잘 알려진 대로 대학 시절 등록금과 수업료 전액을 장학금으로 충당했다. 자기 힘으로 공부를 마친 아들이 기특했던 그의 어머니는 등록금 명목으로 한 푼 두 푼 마련해둔 돈을 아들의 '결혼 선물'로 건넸다.
   
안영모 박사의 교육 철학은 '기본에 충실하기'다. "병원 일로 바빠 교육 문제는 대부분 아내에게 맡겼어요. 아내의 교육 방식 중 대표적인 게 '존댓말 쓰기'였지요. 늘 부모에게 존댓말을 썼던 아이들은 자연스레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람으로 자라더군요. 아내의 '존댓말 대화법'은 지금도 변함없이 진행 중입니다."

손재주 탁월, 가전제품 분해하고 조립
  
안영모 박사는 자녀 교육에 골몰하는 부모들에게 "매사 '내가 곧 아이의 거울'이란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나쁜 건 더 빨리 배우지요. 그래서 더더욱 부모 스스로 언행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일례로 안영모 박사는 팔순을 넘긴 요즘도 틈만 나면 책을 읽는다.)
  
안영모 박사가 떠올리는 '아들 철수'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탁월했다. 틈만 나면 집에 있는 가전제품을 분해한 후 자기 식대로 재조립했다. 대학 진학을 코앞에 두고서도 아들은 '안정적 의대'보다 '도전적 공대' 쪽에 훨씬 관심을 보였다. 결국 의대로 진로를 결정하긴 했지만 그의 '공대생 정신'은 훗날 안철수연구소 창업으로 실현됐다. "사람들 입에 큰아이 이름이 오르내린 건 그 아이가 컴퓨터 바이러스를 개발하면서부터였을 거예요. '컴퓨터 바이러스용 백신'이란 개념 자체가 신기한 데다 특허 등록조차 마다한 채 사람들에게 무료로 백신을 나눠주는 모습이 신기했던 게지요."
  
 안영모 박사는 장남인 안철수 원장 외에 1남 1녀를 더 뒀다. "매년 온 가족이 해외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지난해 큰아이의 서울시장 출마설이 터진 이후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됐어요. 가족이 좀 더 자주 모이길 바라는 저로선 무척 섭섭한 일이지요. 큰아이는 늘 입버릇처럼 '죽은 후에도 이름 석 자를 세상에 남기고 싶다'고 말해 왔어요. 전 그 꿈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단 (정치인이 아니라) 존경받는 교수, 인생의 멘토로서 말이지요."

[- 더 자세한 내용은 주간조선 2216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