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위로받고 아파트에서 치유받을 수 있을까. '아프니까 청춘이다'부터 '에코 힐링(Eco-healing·친환경 치유)' 아파트까지 대한민국 전체가 '위로'와 '치유'에 매달리고 있다. 다들 상처를 쓰다듬고 낙심(落心)을 보듬어주길 기대할 뿐 투지(鬪志)와 패기(覇氣)를 가다듬으려 하지는 않는다. 사회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돈 받고 위로를 파는 마케팅마저 유행한다. 자칫 집단 무기력증에라도 걸릴 듯한 분위기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한 사회의 현안과 욕구가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는 출판시장에서 '힐링(healing·치유)'도서는 대세가 된 지 오래다. 올해 상반기 베스트셀러 1위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부터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낸 혜민 스님의 산문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차지했다. 법륜 스님의 '스님의 주례사', 정목 스님의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 등의 에세이도 경쟁에 지친 사람들을 겨냥한 책들이다. 국립중앙도서관 도서 이용 실태에 따르면 2012년 상반기 이용자들이 가장 많이 대출한 서적은 '힐링도서의 원조'격인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다.

위로와 힐링은 출판시장을 넘어 사회 전반의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삶에 지친 구직자와 군인, 직장인이 차례로 등장해 각각 서로의 처지를 부러워한다는 내용의 동아제약 박카스 광고는 행복을 현재의 삶 속에서 찾자는 위로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화번호 안내 서비스인 '114'는 최근 인사말을 "사랑합니다, 고객님"에서 "힘내세요, 고객님"으로 바꿨다. 공연을 보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마음이 정화된다는 '힐링 공연'도 관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힐링 푸드', '힐링 투어'가 등장하더니 최근엔 아파트에도 '에코 힐링' 바람이 불고 있다.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자는 위로와 힐링이 사람들을 지치게 할 정도로 쏟아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는 왜 위로받기에 열중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장기적인 경기 침체와 한국 특유의 집단적 성향에서 원인을 찾는다. 경제 발전이 지상 과제이던 산업화시대엔 난관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사회적 미덕이었다. 그러나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논리는 불안과 상실감으로 가득 찬 장기 불황기엔 한계에 부딪히게 됐다. 경쟁에 지친 사회일수록 '느리게 가도 실패하는 삶이 아니다', '남을 이기기 위해 애쓰지 말라'는 위로의 메시지에 더욱 열광한다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장기 불황을 겪고 있는 일본의 경우도 한때 힐링산업이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의 한국과 같은 힐링 열풍이 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대 사회학과 김문조 교수는 "같은 사회적 고통이나 좌절에도 집단적인 성향이 강한 사회에선 그 반응이 더욱 극대화돼 표출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회 전체가 위로에 휩쓸리다 보니 감성적인 치유를 주제로 한 책과 각종 상품이 인기를 끌고, 심지어 청년층에 위로와 격려를 한다는 '멘토'가 대통령 후보로 거론될 정도"라고 했다.

위로를 바라는 사회적 욕구에 편승해 힐링이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초만 해도 위로의 대상은 장기 불황 속 취업난으로 사회 진출 기회를 박탈당한 청년층에 국한됐지만, 최근에는 그 범위가 전 세대로 확대되고 있다. 광고업계 관계자는 "'위로 마케팅'은 청년층만이 아니라 학업 스트레스를 받는 중·고생부터 업무 피로에 찌든 직장인, 노후 대책을 고민해야 하는 50·60대 장년층까지 전 세대를 대상으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행·신체 치료 등 분야에선 장년층 이상을 겨냥한 고가의 힐링 상품도 등장했다.

마케팅전략에 따라 위로와 힐링의 의미도 제각각이다.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기(氣)치료 등 대체의학을 통해 심신을 치료한다는 '힐링센터'도 등장했고, 서울에는 타로 점(占)을 보며 심리 치료도 받을 수 있다는 '힐링 타로카페'도 선을 보였다. 지난달 힐링 공연임을 내세운 국악 공연을 관람했던 김모(30)씨는 "웰빙(Well-being)과 힐링이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다"며 "힐링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출판계에선 힐링 열풍 속에 심리 치유서의 출간은 줄을 잇는 반면 인문학과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떨어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힐링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토익 스타 강사 유수연씨는 지난 16일 '유수연의 독설'을 출간했다. 이 책은 현실에 굴복하고 고민에 발목 잡힌 채 우물쭈물 주저앉는 청년층에 위로 대신 '청춘을 채찍질해 세상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서라'며 압박한다.

힐링이 지나치면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위로를 통해 상대와 공감을 하는 등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지나치면 집단적인 무기력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