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종이책 vs 망가진 '킨들'… 종이책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해 에코가 보여준 퍼포먼스. 루브르박물관 2층에서 던졌을 때 종이책 ‘장미의 이름’은 멀쩡하고 전자책 리더 ‘킨들’은 부서졌다.

지난 2일 오후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장서각(藏書閣) 2층 난간. 움베르토 에코(Eco·80)가 아래층 바닥으로 자신의 소설책 '장미의 이름'과 전자책용 기기 '킨들'을 힘껏 집어던졌다. 쾅 소리와 함께 킨들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종이책은 조금 구겨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래 최고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세계적 석학은 종이책의 불멸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틀 뒤인 4일 파리 생 슐피스(St. Sulpice)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루브르에서 킨들과 종이책을 집어던진 건 좀 작위적으로 보였습니다.

"주최 측에서 준비한 겁니다. 물론 겉보기에는 우스꽝스럽지만 실제로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오. 킨들 안에 소설이 100권이 들어 있든 1000권이 들어 있든 종이책의 소멸을 예언하는 사람들에게 e북(전자책)이 이렇게 취약할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거지."

―시대착오적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자신의 아이패드를 꺼내더니) 나도 아이패드 애용자라오. 여행할 때마다 여기에 소설 몇권을 다운받아 읽기도 해요. 난 컴퓨터와 인터넷, 전자책이 주는 효용을 즐겨요. 더 이상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지 않나. 스펠링 체크하거나 정보를 검색할 때마다 녀석들이 얼마나 고마운데."

―그러고 보니 선생은 1983년 퍼스널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부터 열렬한 애용자였네요.

"사람들은 '이제 책이 사라진다'고 하지만 반대로 인터넷이라는 놀라운 발명품이 사라진다는 생각 역시 가능해요. 컴퓨터 저장장치는 끊임없이 변했어요. 예전 플로피디스크, CD롬을 요새 누가 쓰나요. USB는 또 언제 어떻게 될지.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전자책은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정부 통제 아래에서 결정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정부가 보여주고 싶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분해서 통제할 수도 있지. 그러나 종이책은 내가 숨기고 싶으면 아무도 못 찾게 숨겼다가 읽고 싶을 때 꺼내도 되잖아요."

―하지만 인터넷 덕분에 정보는 평등하게 분배되고, 접근이 쉬워졌다는 반박도 많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요. 가령 부자와 빈자가 있다고 칩시다. 돈이 아니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지적인 부자,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으로 불러보자고. 이 경우 베를루스코니(이탈리아 전 총리)는 가난하지. 나는 부자고(웃음). 내가 보기에 TV는 지적 빈자를 돕고, 반대로 인터넷은 지적 부자를 도왔어. TV는 오지에 사는 이들에겐 문화적 혜택을 주지만 지적인 부자들에게는 바보상자에 불과해. 음악회에 갈 수도 있고, 도서관을 갈 수도 있는데 직접적 문화적 경험 대신 TV만 보면서 바보가 되어가잖소. 반면 인터넷은 지적인 부자들을 도와요. 나만 해도 정보의 검색이나 여러 차원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지. 하지만 정보의 진위나 가치를 분별할 자산을 갖지 못한 지적인 빈자들에게는 오히려 해로운 영향을 미쳐요. 이럴 때 인터넷은 위험이야. 특히 블로그에 글 쓰는 거나 e북으로 개인이 책을 내는 자가 출판(Self Publishing)은 더욱 문제요. 종이책과 달리 여과장치가 없어요.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선별과 여과의 긴 과정이오. 특히 쓰레기 정보를 판단할 능력이 부족한 지적 빈자들에게는 이 폐해가 더 크지. 인터넷의 역설이오."

트레이드 마크였던 턱수염을 밀어버린 뒤 움베르토 에코는 익살스러운 이웃 할아버지의 표정을 얻었다. 유머가 생활방식인 이 학자는 수염을 자른 이유를 묻자“밤에 잘 때 마다 턱수염이 콧구멍으로 파고들어 와 가려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익살을 부렸다. 턱수염이 콧구멍을 파고든다는 건 에코 특유의 과장법이다.

에코는 30대 이후 카메라를 갖고 다닌 적이 없다. 프랑스의 남부 해변을 여행했던 청년기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무나 매혹적인 풍광. 당시 최첨단 코닥 카메라로 정신없이 눌러댄 셔터…. 하지만 귀국 후 여행의 추억은 최악으로 남았죠. 뭐가 잘못됐던지 인화된 사진은 엉망이었고, 정작 내 눈으로는 뭘 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어요. 그때부터 카메라 없이 모든 것을 내 눈으로 보기로 결정했지요. 요즘 젊은 세대는 안타까워요. 휴대폰이나 카메라 없이는 요즘 아이들은 세상을 볼 수 없나 봅디다."

―대부분 아이들이 그런 것 아닌가요.

"오늘 아침 신문에서 충격적인 기사를 읽었소. 피렌체에서 한 젊은 커플이 광장 한 귀퉁이에서 술에 완전히 취해 키스를 하고 있었다지. 마침내 섹스까지 이어졌다고 하오. 그런데 사람들이 이들을 말리거나 경찰을 부른 게 아니라 모여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는 거요. 모든 경험을 인공 눈(Artificial eye)으로 하는 거지. 왜 그랬을까. 마치 포르노 출판업자처럼 사진을 찍어대다니 말이오."

―인터넷, 포털, SNS는 우리의 직접 경험을 제한하고 통제합니다. 인터넷이 백과사전이자 학교인 손자 손녀들에게 인터넷 시대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친다면 뭐라 하렵니까.

"학교에서 정보를 여과하고 필터링하는 법, 분별력을 가르쳐야 해요. 인터넷 정보를 이용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반드시 '비교'를 해봐야 하오. 하나의 정보 소스만으로는 절대 믿지 말 것. 같은 사안에 대해, 가령 열 개의 정보를 찾아본 뒤 꼭, 꼭, 꼭 비교할 것. 이것이야말로 교사들이 먼저 실천하고 가르쳐야 해요."

―비단 인터넷 교육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항상 회의하라(Always be skep tical). 그걸 배워야 합니다. 위대한 기술이자 학습 방법이오. 사람에 대한 판단은 여럿의 이야기를 종합해보고 나서 결정하라는 것도 같은 이야기야. 사실상 교육의 유일한 방법론이오. 회의를 바탕으로 다른 정보를 취하고, 비교해서 판단하라. 교사들은 이렇게 얘기해야 하오. 인터넷도 물론 사용하되 관련 책도 찾아 읽어보라고. 그리고 따져보라고."

[에코는] 언어·기호·철학·미학·역사학자 겸 소설가… 지식계의 '육식공룡'

"당신 별명이 '세상의 모든 지식'"이라고 하자, 에코는 답했다. "모두 위조고 날조야. 사람들의 말을 믿지 말라고(웃음)."

193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에코는 언어학자이자 기호학자이며, 철학자, 미학자, 역사학자이며 동시에 베스트셀러 소설가다. 평생의 관심은 참과 진실, 위조와 날조의 메커니즘, 상호보완재이자 대칭으로서 이 둘의 관계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식계의 티라노사우루스'로 불릴 만큼 엄청난 독서를 자랑한다.

1980년 쓴 첫 번째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전 세계 지성과 독자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등을 썼다. 올가을에는 여섯 번째 장편 소설 '프라하 공동묘지'가 출간된다.

그의 책은 42개 언어로 번역됐는데, "한국은 내가 쓴 모든 책을 번역한 몇 안 되는 예외적 나라"라고 고마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