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 선임기자

취재차 사흘간 필리핀에 머무는 동안 머릿속에서 '성장'과 '분배'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1960 ~70년대 아시아 강국(强國)이던 한 나라의 침체를 목격하며 국가에 성장은 멈출 수도, 멈춰서도 안 될 과제라고 생각했다. 놀라운 것은 쓰러져가는 추레한 건물 사이에 버티고 선, 어느 선진국에도 없는 화려하고 거대한 쇼핑몰이 이 나라 거대 가문(家門) 소유라는 사실이었다. 부의 쏠림이 낳을 수 있는 극단적인 사례가 멈춰버린 성장 곁에 있었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와 동양의 강자였던 국가의 운명이 엇갈린 것은 출신·경력·성격까지 비슷했던 박정희와 마르코스, 두 대통령 치하(治下)였다. 당시 외교가에서 두 사람의 닮은 점은 화제였다고 한다. 1917년에 태어난 두 사람은 까무잡잡한 얼굴, 날카로운 눈매, 작은 키, 카랑카랑한 목소리까지 비슷했다. 박정희가 그랬듯 마르코스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훈장을 27개나 받은 군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1966년 그런 두 사람이 만났다. 월남 참전 7개국 정상회담 자리였다. 당시 한국의 1인당 GNP는 130달러였고, 필리핀은 269달러로 동남아 선두그룹이었다. 마르코스는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을 무시하고 경원(敬遠)했다. 이유는 월남전에 보낸 병사 수 때문이었다. 한국은 4만2500명을 베트남에 보냈다. 가난했지만 미국에 이어 둘째로, 발언권이 셌다. 호주가 4500명으로 3위, 필리핀이 2000명, 뉴질랜드 170명, 태국은 17명에 불과했다.

당시 월남전 참전을 앞두고 반전(反戰) 움직임은 한국에도, 필리핀에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박정희가 월남전을 기회로 여겼고 마르코스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뚜렷한 대비(對比)가 두 정상의 연설에 나타난다. 마르코스는 회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맨 처음 환영사에서 느닷없이 평화론을 편 것이다. "평화와 자유는 모든 인류의 권리이며 소망입니다. 평화와 자유가 없는 곳에 인류의 번영과 행복은 없습니다…." 단상(壇上)에 앉은 수뇌들의 표정이 변했다. 그중에서 가장 대로(大怒)한 이는 존슨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마르코스의 말이 시작하기 무섭게 열렬히 손뼉을 쳐댔지만 사람들은 그게 분노의 표현임을 알고 있었다.

박정희의 연설은 달랐다. 월남전에서 휴전이 이뤄지기 전까지 외국 군대가 철수해선 안 된다며 월맹(越盟)의 베트콩 지원 중지를 촉구했다. 말은 베트남을 향했지만 실은 한반도의 안전을 고려한 심모원려(深謀遠慮)였다.

마르코스는 자신이 평화주의자임을 과시하는 데 그쳤지만 대한민국은 한 지도자의 선택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국군의 현대화가 이뤄졌고 외화 획득 통로가 열렸으며 기업인들의 해외 진출 물꼬가 터졌다. 두 사람은 마지막이 같았다. 장기 집권의 끝에 한 명은 암살당하고, 다른 한 명은 성난 국민에게 쫓겨난 것만 달랐을 뿐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다스렸던 국가의 지금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앞으로 여섯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새 지도자를 선출한다. 그렇게 환호받던 한 지도자의 형이 영락(零落)하는 모습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에 차있던 지도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우리는 지켜봤다. 그런가 하면 누구는 북한에 모든 것을 갖다 바쳤다는 의심을 사후(死後)까지 받고 있으며, 또 누구는 나라를 거덜낼 뻔했다는 무능(無能)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우리 국민이 그만큼 대한민국호(號)의 명운을 가를 위대한 결단을 본 지 오래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벌써부터 터져나오는 포퓰리즘 공약의 범람 속에서 필리핀에서 얻은 단상(斷想)을 굳이 적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