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11월 경성(서울). "일반 음식점과 료리업자는 물론 설렁탕집에서도 큰 타격을 밧게 되는" 사건이 터졌다. 어느 '간상배(奸商輩·간사한 방법으로 부당한 이익을 보려는 장사꾼의 무리)'가 시내 두 시장을 돌아다니며 화학조미료를 싹쓸이해 간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계속된 이른바 '전시 체제' 아래서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자 "(조미료를) 매점해다가 다대한 이익을 보려는 야망에서 그와 가치 휩쓸어간 것"이었다(1939년 11월 16일자). 그만큼 화학조미료는 당시 최고의 음식 재료이자 식당 영업 필수품이었다.

1907년 일본 도쿄대 이케다 기쿠네(池田菊苗) 교수의 발견에 따라 1908년부터 일본에서 생산·판매가 개시된 화학조미료 '아지노모토(味の素)'는 초기부터 소량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감칠맛을 돋우는 이 흰 가루는 간장·고추장·된장만을 조미료로 알던 조선인들의 혀를 놀라게 했다. 일본의 화학조미료 회사는 1920년대엔 이 땅의 냉면집, 설렁탕집 등 음식점을 공략하더니, 1927년엔 평양 대동문 근처에 냉면집을 직접 열어서 '조미료 육수' 맛을 선보였다(국립민속박물관 '세시풍속사전'). 한 갑에 약 80전(약 1만6000원), 결코 싸지 않은 가격이었지만 화학조미료는 부유층을 중심으로 가정집에까지 보급이 확산됐다.

김장철 신문에 등장한 일본산 화학조미료 광고.“ 김치 국물에 치면 맛이 천하일품이 된다”고 선전하고 있다(1933년 11월 5일자).

1925년 3월 15일자 조선일보엔 '아지노모도' 광고가 처음 눈에 띈다. 출근 시간 전차 타는 회사원들 그림과 함께 "일 분 일 초를 다투는 밧분 중에 이것은 우(又) 편리 지극(至極)한 만인의 조미료"라고 했다. 오랜 시간 국물을 우려낼 필요가 없다는 간편함을 강조한 것이다. 1920년대 중·후반부터는 한국 가정 요리의 구체적 목록을 시리즈처럼 하나씩 열거해 가며 사용을 권했다. '배추 등 채소 요리'(1926년 3월 6일자)에 넣으라고 하더니 신선로, 지짐이에도 필수 양념인 것처럼 광고했다(1929년 8월 24일자, 1935년 11월 20일자). 김장철엔 "대발견! 모든 김치 국물에 아지노모도를 치면 맛이 천하일품 됩니다!"라고 선전했다(1933년 11월 5일자). 화학조미료가 '새로운 깃븜'(1929년 5월 26일자)이자 '가뎡의 보물'(1929년 6월 9일자)이라고까지 광고했다. 요리 전문가가 기고한 요리 기사에서도 '화학조미료'는 음식 재료 목록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1934년 3월 9일자). '남용'에 대한 우려는 고개도 들지 않던 그 시절, 화학조미료는 사회면 기사에서도 "식욕을 돋구는 조미료의 왕자"(1939년 11월 16일자)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