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에 사는 회사원 이영지(가명·여·32)씨 가정은 15년 전 아버지(58)가 술을 입에 대면서 서서히 무너져 갔다. 이씨의 아버지는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가 1997년 IMF 사태로 부도가 나자 입에도 못 대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하루 소주 한 병은 기본이었다. 술에 취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그나마 돈을 벌던 일용직 노동일도 끊기자, 어머니(55)가 식당에 나가 돈을 벌었다. 아버지 이씨는 집에서 술에 취해 있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개X아, 내가 우습게 보이냐"며 욕설과 폭언을 하다가도 술이 깬 다음 날 아침에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5년간 이런 날이 계속되자 결국 어머니는 이혼을 요구했고, 이때부터 폭행도 시작됐다. 발로 배를 걷어차인 어머니가 혼절해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그래도 가족들은 "남편이고 아버지이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5년을 더 참다가 결국 2년 전 집을 나갔다. 어머니가 사라지자 아버지는 딸 이씨에게 손을 댔다. 술을 먹으면 이씨의 머리채를 잡고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나가라"며 난동을 부렸다. 이씨는 취직한 뒤 아버지를 알코올중독센터에 보냈다. 이씨는 "술만 먹으면 아버지는 남편도 가장도 아닌 악마였다"며 "술이라면 지긋지긋하다. 난 입에도 안 댄다"고 말했다.

◇주폭의 최대 피해자는 가족…조폭과는 살아도 주폭과는 못 산다

주폭(酒暴)의 최대 피해자는 동네 가게 주인이나 응급실 의사가 아니다. 주폭과 같이 사는 가족들이다. '주폭'이란 용어를 처음 만든 김용판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주폭 피해자들을 만나보면 '조폭과는 살 수 있어도 주폭과는 못 살겠다'고 한다"고 전했다.

(왼쪽 사진)술 취해 부부 싸움하다 흉기로 남편 위협… 6일 새벽 2시쯤 서울 중랑경찰서에서 술에 취해 부부 싸움을 벌이다가 흉기로 남편을 위협한 여성이 조사를 받고 있다. (오른쪽 사진)음주 폭력으로 부부가 함께 경찰서에… 주폭(酒궅)에 평범한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 지난 5월 초 서울 마포경찰서에 음주 가정폭력으로 한 쌍의 부부가 조사를 받기 위해 들어왔다. 이들은 얼굴을 가린 채 서로 마주 보지도 않았다.

주폭의 가족들은 이씨처럼 10년 넘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가족이라서'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는다. 2010년 남편으로부터 폭행당한 아내가 경찰에 신고한 비율은 8.3%에 불과했다. 같은해 음주로 인한 가정폭력 발생건수는 1891건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이 수치는 주폭들이 휘두르는 가정폭력의 '빙산의 일각'이란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윤명숙 전북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주폭의 가족들은 '죽여버린다'는 등의 협박과 행패에 심한 공포감을 느껴서 대부분 신고를 망설인다"며 "경찰에 신고를 해봤자 훈방 조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것까지 감안하면 전체 규모는 최소 수십 배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주폭들의 가정폭력은 문제가 곪을 대로 곪은 다음에 수면 위로 드러난다. 부산에 사는 임수영(가명·34)씨는 술 취한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지난달부터 별거 중이다. 평범한 회사원인 남편 김모(32)씨는 집에서 혼자 양주를 마시고 아내에게 욕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올해 초 출산 후 임씨가 야간 근무를 할 때 남편 김씨가 아이를 돌보는 일이 잦아지면서 문제가 커졌다. 김씨는 집에서 혼자 양주를 마시다가 근무를 마친 임씨가 돌아오면 "애는 나 혼자 돌보느냐! 너는 엄마도 아니다"라며 욕을 하고 컵을 던지거나 주먹을 휘둘렀다. 행패는 임씨의 야근 근무가 있는 화·금요일마다 반복됐다. 결국 지난 4월 김씨는 집에 온 임씨의 목을 붙잡고 침대로 끌고 가서 올라탄 뒤 한 손에 우는 아이를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 임씨를 마구 폭행했다. 임씨는 그날로 아이와 함께 친정집에 들어갔다.

[[천자토론] 술에 너그러운 대한민국,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