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아. 내가 술 취했다고 무시하는 거야!"

4일 밤 11시 40분 서울역 광장. 노숙자 김모(46)씨가 여성 노숙자 이모(38)씨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면서 폭행하고 있었다. 김씨는 이미 만취해 발음이 꼬이고 걸음도 비틀거렸다. 취한 김씨가 여기저기 시비를 거는 것을 본 이씨가 "술 먹었으면 곱게 가서 자라"고 한 것이 싸움의 발단이 됐다. 김씨는 10여분간 이씨에게 "닥쳐라" "계속 까불면 맞는다"고 소리쳤다. 발로 차고 머리채를 잡고 마구 흔드는 등 5분간 폭행이 이어졌다. 주변의 노숙자들이 말리면서 폭행은 끝났지만, 김씨는 이후에도 윗옷을 벗어 던지고 20분간 행인들을 위협했다.

이날 밤 8시부터 5일 새벽 2시까지 서울역 앞에서 술판을 벌인 노숙자는 모두 33명. 이들이 마신 술을 모두 합하면 소주 42병, 막걸리 20병이었다. 소주 한 병(360mL)은 1200원, 막걸리 한 통(750mL)은 1300원. 인근 가게에서 7만6400원이면 이 술을 모두 살 수 있다. 안주는 김과 고등어통조림, 과자가 전부였다. 10명가량은 그냥 소주만 마셨다. 김씨도 소주만 마시고 만취했다. 서울역에서는 매일 밤마다 노숙자들이 구걸 등으로 번 돈으로 술을 사 마시고 취해서 행패를 부리는 모습이 되풀이된다.

서울역 만취 노숙자, 아침부터 육박전 - 5일 오전 동이 훤하게 텄는데도 서울역 중앙 계단에서 만취한 노숙자 두 명이 뒤엉켜 싸우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만취한 또 다른 노숙자가 고개를 땅에 박은 채 자고 있다.

소주를 마신 노숙자들의 행패가 끊이지 않다 보니 서울역에 입점한 스토리웨이(옛 홍익회 매점)에서는 정책적으로 소주를 팔지 않는다. 스토리웨이를 운영하는 코레일 관계자는 "자체 조사를 해보니 노숙자들은 주로 값이 싼 소주만 사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노숙자들 행패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2007년부터 소주는 일절 판매를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숙자들은 역에서 100m가량 떨어진 작은 수퍼나 편의점에서 구입하고 있었다. 이곳은 노숙자들의 '술 공급처'인 셈이다. 지하철 서울역 1번 출구 앞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박모(63)씨는 "먹고 살아야 돼서 어쩔 수 없이 소주를 판다"면서도 "가끔은 돈이 없어서 행패를 부리면서 소주를 그냥 가져가는 노숙자들도 있다"고 말했다.

싼 술값은 김씨 같은 노숙자들까지 주폭(酒暴)으로 만드는 원인이다. 에비앙 생수(330mL·편의점 기준 1500원)보다 소주가 싼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충북지방경찰청에서 2010년부터 1년간 잡아들인 주폭 100명 중 60명이 직업이 없었다. 나머지도 18%는 일용직 노동을 하고 있었고, 고물상 등 저소득층이 대부분이었다.

밤에는 술판 - 4일 밤 10시 10분쯤 서울역 주변 화단에서 노숙자 2명이 소주와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이들은 소주 4병과 막걸리 2병을 마셨는데, 인근 가게에서 7400원이면 구입할 수 있다.

충북청 관계자는 "잡힌 주폭들은 대부분 소주나 막걸리처럼 싼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패턴이 나타났다"며 "소득이 거의 없는 이들이 쉽게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싼 술값 때문"이라고 말했다.

술값이 싸다 보니 노숙자뿐 아니라 저소득층 사람들도 폭음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서울 강북 지역에 살면서 자녀 2명을 둔 이모(42)씨는 6년 전부터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한 달에 120만원가량을 받지만 매일같이 술을 마신다. 주로 소주와 막걸리를 섞어서 하루 4~5병가량 마시는데 한 달에 60만원이면 된다. 예전에는 택시운전을 했지만, 결국 술 때문에 면허취소까지 당하고 직업을 잃은 뒤 그길로 술독에 빠졌다. 아내는 7년 전 술에 취한 이씨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갔다. 결국 이씨는 올해 초 알코올 중독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서울 강남구에서 중국집 배달일을 하는 조모(29)씨도 전형적인 저소득층 알코올 중독자다. 조씨는 매일 일이 끝나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때로는 동료와 함께, 때로는 혼자서 소주 두 병은 마신다.

싼 술값의 최대 피해자는 역설적으로 저소득층이다. 술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보니, 술에 더 의존적이 되고, 술 때문에 가난의 굴레에서 더 벗어나지 못한다. 조씨 역시 한 달 수입이 200만원인데, 빚은 1000만원이 넘는다. 술을 자주 마셔 매일 일을 못 나가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통계적으로도 이씨나 조씨 같은 저소득층의 폭음 비율이 고소득층보다 높다. 고위험음주율은 고소득층이 14.9%인 데 비해 저소득층은 19.4%였다. 고위험음주율이란 연간 음주자 중 1회 평균 음주량이 7잔(여자 5잔) 이상으로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술을 마시는 경우다. 저소득층의 고위험음주율은 2005년 16.1%, 2007년 17.6%, 2008년 23.5%로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거의 매일 폭음(소주 1병 이상)하는 비율 역시 저소득층은 10.7%인 데 비해 고소득층은 6.5%에 그쳤다.

홍익대 국제경영학부 장근호 교수는 "소주는 서민의 애환을 달래는 술이란 국민정서 때문에 가격이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돼 청소년까지 쉽게 만취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사회적 폐해가 한둘이 아니다"면서 "싼 술값으로 주폭들이 늘어나는 등 사회적 비용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술의 적정 가격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