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감방에 있을 때 벽지용으로 받은 종잇조각 8쪽을 오려붙여 만든 거예요. 허허허."
액자 속 손으로 그린 세계지도를 가리키며 그가 웃었다. 10여년 전 만 5년간의 '감옥의 추억'도 이제는 옛일인 듯했다.
2일 저녁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4층. 정수일(78)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은 역주서 '오도릭의 동방기행'(문학동네) 출간기념회장에서 하객을 맞으며 함박웃음이었다.
'오도릭의 동방기행'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이븐 바투타 여행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더불어 세계 4대 여행기로 꼽히는 작품. 이 중 '동방견문록'을 제외한 세 권이 그의 손으로 국내에 번역됐다. 3관왕인 셈이다.
이날 출간기념회는 간이 전시회를 겸했다. 입구에 이어 붙인 책상 위에는 그의 저술 밑천들이 자리 잡았다. 먼저 1988년 판 2349쪽짜리 국어대사전. 맨 마지막 장에 '1997.3.26~ 1998.6.4 독파'라고 적혔다. 우리 글을 제대로 쓰기 위해 감옥에 있는 동안 매일 5~6쪽씩 읽어내려가며 단어를 익혔다고 한다. 누르스름하게 빛이 바랜 사전 속 단어들 옆에는 검은 점들이 찍혔다. 중요 단어 표시다. 희뿌연 양면 편지지에 손글씨로 ㄱㄴㄷ 색인 항목까지 만든 '문명교류사전' 초고도 보인다. 항목이 약 950개나 되는데, 미완으로 남았다. 중간 크기 액자에 넣은 지도도 2개나 보였다. 벽지용 종이를 이어붙인 위에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의 여행로를 직접 그린 것이다. 축척 1:37,000,000이라고 적은 전도 위에 붉은 사인펜으로 경로를 표시했다.
지금은 국내 문명교류학의 대가로 입지를 굳혔지만 그는 한때 '무함마드 깐수'로 더 유명했다. 1996년 7월 공안 당국이 그를 두고 '아랍계 필리핀인으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이라고 발표했을 때 세상은 귀를 의심했다. 부인까지 대경실색했다. 그는 그 뒤 옥중에서 학문에 매진, 국내 '동서문명교류사'와 '아랍 이슬람학'의 전위가 됐다.
중국 옌볜에서 태어나 베이징대를 졸업하고 북한으로 갔다가 남파 간첩으로 한국의 감옥 생활까지 겪은 그의 인생 자체가 굽이굽이 한 편의 여행이다. 그 모진 여정을 학문적으로 하나 둘 승화시켜 가고 있다. 동양어 7종과 서양어 5종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그는 꿈도 아랍어로 꿀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방기행'은 14세기에 이탈리아의 프란치스코 수사 오도릭이 12년간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 중앙아시아를 두루 여행한 산물이다. 청빈하고 독실한 사제 신분으로 동방 각 지역의 인문지리, 생활풍습, 물산, 종교, 유물유적, 기담과 기적 등 여로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정 소장은 풍부한 주석을 통해 동시대 글인 '동방견문록'과 '이븐 바투타 여행기', 이수광의 '지봉유설', 최한기의 '지구전요' 등 우리 고전의 관련 내용까지 엮어 넣었다.
그는 그동안 연구소 차원에서 실크로드 답사를 해왔다. 오아시스 육로와 중앙 초원로는 이미 마쳤다. 작년부터 남방 해로 탐험에 나섰다. 올해는 중남미를 경유한 60일 답사를 계획 중이다. 내년에는 아프리카 지중해, 서남아 쪽 해로 답사를 구상 중이다. 그의 여행은 아직도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