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4시20분쯤 부산 남구 대연동 UN기념공원 캐나다군 묘역.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바람도 거셌다. "땅" "땅" "땅" 조총(弔銃) 소리가 잔뜩 흐린 하늘에 울렸다.

"아빠…" 캐나다에서 온 데비(Debbie·52)씨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는 캐나다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아치볼드 허시(Archibald Hearsey) 하사의 외동딸이다. 아치볼드는 형 조지프(Joseph) 옆에 있기 위해 수만리를 건너 이날 안장됐다.

우산을 받쳤지만 데비씨의 검은색 웃옷은 비에 축축이 젖었다. 소매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검은 색 샌들 속의 하얀 발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가로 세로 30㎝가량에 70㎝ 깊이로 파진 무덤에 아버지 아치볼드 하사의 유해함이 안치됐다. 데비씨는 "아빠와 영원히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너무 슬프지만 한국에 오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신 아빠가 무척이나 기뻐하실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동안 유해함 위로 차마 흙을 뿌리지 못했다. 옆에서 엄마 손을 꼭 잡고 있던 아들 살로먼(Soloman·16)군이 대신 흙을 뿌렸다. 말총머리를 한 그는 할아버지가 입던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소매는 짧았고 엉덩이 쪽은 헐렁했다. 살로먼 군은 "할아버지는 정이 많은 분이었다. 할아버지를 추억하기 위해 평소 즐겨 입으시던 양복을 일부러 입었다"고 말했다.

데비씨는 유해함을 감쌌던 흰 보자기를 손에 꼭 쥐었다. 아빠를 땅에 묻고 마음에 묻는 동안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렀다. 데비씨는 "아버지는 6·25전쟁 경험담을 많이 들려 주셨는데 항상 마지막엔 먼저 전사한 큰아버지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州) 작은 마을 이그나스(Ignace) 출신인 아버지 아치볼드가 먼저 한국전에 참전했고, 동생이 걱정된 형 조지프는 뒤따라 참전했다. 형은 1951년 10월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총탄을 맞았으며, 전장에서 극적으로 만난 동생의 품에 안겨 숨을 거뒀다.

데비씨는 "아버지가 '그때야 형이 나를 보호하려고 뒤늦게 참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되뇌곤 했다"고 말했다. 데비씨는 고통과 싸우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힘겨운 시간을 견뎌야 했다. 데비씨는 "아버지는 적에게 둘러싸인 형을 구하려는 꿈을 자주 꿨고, 그때마다 침대 옆 탁자에 주먹질을 했다"며 "아버지의 손에 든 피멍도 당신의 마음속 상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데비씨는 "전례가 없는 형제 합장을 허락한 한국에 정말 감사한다"고 했다. UN기념공원에는 지금까지 전사자의 부인만 합장을 허락했다. 형제 합장은 이번이 처음이다.

허시 형제의 사연을 국가보훈처에 알려온 한인 출신 첫 캐나다 상원 의원 연아 마틴(Yonah Martin·한국 이름 김연아)과 합장을 위해 현지에서 기금을 모아준 분들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큰아버지와 아버지 같은 무명용사들이 청춘과 목숨을 바쳐 지킨 한국이 잘사는 나라가 돼 있어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더욱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날 허시 형제 합장 안장식에는 영국, 뉴질랜드, 호주 등 영연방 참전용사와 가족, 국군과 국가보훈처 관계자, 시민 등 200여 명이 함께 했다. 데비씨 모자(母子)는 26일 경기도 파주 적성에서 열리는 임진강전투 기념식에 참석하고,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의 만찬에 참석한 뒤 27일 출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