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경기도 안성의 한 김치공장. 직원들은 원산지가 '중국'으로 적힌 포대에 담긴 배추·마늘·양념 등을 '국내산'이란 스티커가 붙어 있는 포대로 옮기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김치를 만들 때 들어가는 원료인데, 혹시 김치 담그는 중에 원산지 단속반이라도 나올까봐 미리 국내산으로 표시된 포대에 담아 놓는 것이다. 이렇게 '국적(國籍) 세탁'에 성공한 중국산 김치는 10㎏당 8000원이던 '몸값'이 1만4000원으로 갑절 가까이 뛰어 올랐다.

국내산으로 둔갑한 중국산 김치는 지난 3년 3개월(2008년 5월~2011년 8월)동안 전국 400여개 유치원과 초·중·고교에 급식으로 납품됐다. 이중 서울과 경기지역 학교가 350개에 달했다. 공급된 김치는 총 4500t(63억원어치)가량이었다. 학교 급식 한끼에 배급되는 김치량은 약 30g. 단순 셈법을 하면 1억여명 분이다. 전국 유치원생과 초·중·고교생(736만명)에게 매일 한끼씩 20일 동안 공급할 수 있는 양이다.

지난 2010년 이후 서울 등 전국 대부분의 교육청에서는 국산 원자재를 사용한 '친환경 무상급식'을 한다고 발표해 왔지만, 일부 학교에서는 중국산 김치가 국적이 세탁된 채 학생들 식탁에 올랐던 것이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5일 허위로 원산지 표시를 한 혐의로 김치·순대 공장 사장인 장모(57)씨를 구속하고 공장 관계자와 금품을 받은 공무원 등 1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들 김치 포장지에는 국내산이라는 표기와 함께 해썹(HACCP)마크도 붙어 있었다. 해썹은 정부(식품안전의약청)가 식품에 대해 안전하고 위생적이라고 인증해주는 제도다. 하지만 김치공장 사장 장씨는 식약청 조사관을 골프 접대와 수백만원의 금품으로 매수해서, 위생 상태 등에 대한 현장조사도 안 받고 해썹 마크를 따낸 것이라고 경찰은 밝혔다.

장씨는 또 전북 김제에 있는 자기 소유 공장에서도 호주산과 중국산 식재료를 국내산으로 둔갑시켜 순대를 만들어 학교에 국내산 급식 상품으로 납품하면서 35억원의 부당이익을 올린 것으로 조사됐다. 이른바 진보 교육감들은 무상급식을 추진하면서 '친환경 국산 농산물'을 대표적 슬로건으로 내세웠지만 중국산에 뚫리고 만 것이다. 일반 가정의 식탁도 여전히 국적을 세탁한 식품들에 위협받고 있다.

최근 5개월 사이 중국산을 국내산으로 바꿔치기한 쌀·소금·고춧가루, 비위생적 환경에서 불법 제조한 구더기 젓갈, 썩은 고추가루, 인체에 위험한 빙초산에 절인 가오리, 양잿물에 담가 중량을 늘린 해삼 등의 유해식품 사건이 잇따라 적발됐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원산지를 허위 표시하거나 아예 표시를 하지 않은 식품 적발 건수는 2010년 4894건에서 지난해엔 5516건으로 13% 정도 늘었다. 건국대 이승신 소비자정보학과 교수는 "먹을거리를 둘러싼 이 같은 유해 식품 사건들은 전형적인 후진국형 사건"이라고 말했다.

양승룡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국민건강을 심각하게 훼손한 경우 규정에 따라 징역형을 철저히 적용하는 등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불량 식품을 만들어 얻는 이익보다 손해가 크다는 인식이 자리 잡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 HACCP(식품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

식품 원재료 생산부터 유통까지 각 단계에서 식품에 유해 물질이 유입되거나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위생관리 시스템. 정부는 해당 식품이 안전하고 위생적이라는 것을 인증하기 위해 'HACCP' 마크를 붙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