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馬)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볼일을 보지 아니하고" 손꼽아 기다린 행사가 1921년 9월 23일 여의도에서 열렸다. 서울에서 두 번째로 열린 경마(競馬)대회였다. 수천 관중들은 경주마가 들어올 때마다 "폭죽 소리와 가치 박수갈채성"을 올렸다.(1921년 9월 25일자) 서울의 첫 번째 경마대회는 같은 해 5월 열렸었다. 말들의 경주를 보려는 사람들이 몰리자 남대문부터 노량진까지 임시열차가 운행됐다.(1921년 9월 14일자) 여의도 경마장에선 관중의 무게를 감당 못해 객석 일부가 무너졌고, 대회장으로 가던 자동차가 노량진에서 전복되는 사고도 일어났다.(1921년 9월 25일자)

경마 초기엔 입장객은 많았지만 승리할 말을 점찍어 돈을 거는 마권 판매량은 저조했다. 사람들이 대부분 "아즉 경마라는 것이 엇더한 것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관계로… 그대로 경마 하는 구경만 할 뿐이지 투표 가튼 것을 하는 사람을 별로히 볼 수가" 없었다.(1929년 4월 9일자) 1924년 6월의 인천경마대회 때는 마권이 너무 안 팔린 탓에 주최측이 수천원(수천만원)을 손해보기도 했다.(1924년 7월 6일자)

경마장 손님이 급증하던 1928년 경성경마장 모습을 보도한 조선일보 사진.‘시원한 경마’라는 제목을 사진에 붙였다.(1928년 9월 24일자)

그러나 남녀노소가 이 '합법적 도박'의 유혹에 빠지는 데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1929년이 되자 "경마 도박을 하는 방법을 잘 알엇슴인지 갑자기 조선사람의 수효가 늘게 되어 하루에 평균 만여 명식 드러오는 입장자 중의 약 칠천 명이 조선사람"이어서 "일본사람들도 혀를 내돌르고 경탄"했다. "승리를 한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고 배당을 차지려 미친드시 투표장으로 다름질 치고, 실패를 한 사람들은 얼골빗이 백지장 가치 되어 마권을 긴 한숨과 함께 갈갈이 찌저 업새는 정경"을 빚었다.(1929년 4월 9일자) 경마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백여원(약 200만원)을 잃고 부모 처자와 함께 길거리에 나앉는가 하면(1929년 12월 3일), 장사 밑천으로 빌린 80원(약 160만원)을 날리고 비관하다가 자살한 상인도 있었다.(1936년 10월 3일자)

초기엔 경마를 "오락적이고 참 유쾌하며 남성적"(1921년 4월 30일자)이라고 했던 신문도 태도를 바꾸기 시작한다. 경마를 "돈 잇고 시간 남는 일부 계급의 향락"(1928년 12월 17일자)이라고 꼬집은 조선일보는 시대의 '못된 유행'을 다루는 시리즈에서 경마를 다루며 "그러치 안허도 생활이 어려웁고 허욕이 만흔 조선사람을 더 한층 빨리 비운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한다… 그리 조치 안흔 괴악한 류행"이라고 지탄했다.(1929년 4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