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7일 입시학원 영어강사 이모(53)씨는 10여년 전 뉴질랜드 체류 시절 알게 된 외국인 A씨를 경기도 수원에서 만나 외국인 B씨를 소개받았다. 이들은 이씨에게 지폐 크기의 새까만 종이를 투명한 액체 약품에 담갔다가 꺼낸 뒤 100달러 미국 지폐로 바꾸는 모습을 보여줬다. A씨는 "B씨는 내전을 피해 탈출한 앙골라 고위층 자제인데, 현금 1000만달러를 밀반출하기 위해 100달러지폐에 검은색 약품을 칠한 '블랙머니'로 바꿔 갖고 나왔다"며 검은색 종이 다발이 가득한 여행가방을 함께 보여줬다.
이들은 이씨에게 "보관비와 약품비를 보태주면 돈을 나눠주겠다"고 제안했고, 이씨는 며칠 뒤 이들에게 1200만원을 건넸다. 하지만 블랙머니는 가짜였고, 앙골라 고위층 자제라는 것도 거짓말이었다.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드물게 '미국식 영어'를 쓰는 라이베리아 출신들이었다. 이씨는 "A씨가 워낙 미국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아프리카 출신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지난달 16일 검게 칠한 종이 다발을 미화 지폐라고 속이고 약품처리비 등의 명목으로 돈을 받아 가로챈 혐의로 A씨를 구속하고, 달아난 B씨를 쫓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블랙머니는 요오드용액과 베이비파우더를 섞어 만든 약품을 입힌 종이였고, 피해자들을 속이기 위해 진짜 100달러 지폐를 몇장 끼워넣은 것에 불과했다. 경찰 관계자는 "블랙머니 사기를 벌이는 외국인은 주로 영어권 아프리카 국가 출신"이라며 "신변 위협 때문에 도피한 고위층 행세를 하면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범죄자들이 대부분 영어를 쓰는 외국인이어서 피해자도 은행지점장이나 전직 외교관, 강사 등 '화이트칼라'가 많은 편이다.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송경호 팀장은 "블랙머니라는 말을 끝까지 믿고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 피해자들도 있다"며 "10년째 블랙머니 사기가 끊이지 않는 이유"라고 말했다.
입력 2012.02.18. 03:06업데이트 2012.02.1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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