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PD 정모(35)씨는 1998년부터 지금까지 서울중앙지법 법정에 30번 넘게 드나들었다. 정씨가 법원에 발을 들인 것은 서초동에서 대학 통학 버스를 타면서부터다.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그는 "문득 연출과 시나리오 작업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수업을 빼먹고 재판을 방청했다. 정씨는 이후 4~5개월마다 일정을 비우고 형사 공판을 보러 간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사실 그 자체를 볼 수 있잖아요. 분유값을 마련하려고 강남 부잣집을 턴 20대 피고인이 있었어요. 증인으로 나온 어머니는 판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고, 부인 등에 업혀 있던 갓난아기는 자지러지듯 울었어요. 짤막한 기사로 나온 사건을 저는 법정에서 깊숙한 내막까지 봤죠."

일본에서 사회현상으로 등장했던 '재판 마니아' 바람이 국내에서도 불고 있다.

최근 '이태원 살인 사건'(2009) '의뢰인'(2011) '부러진 화살'(2011) 같은 법정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재판 광경을 직접 보고 싶어하는 시민이 늘고 있다. '그림자 배심원'도 인기다. 마치 정식 배심원처럼 공판 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유·무죄를 판단할 수 있는 일종의 체험 프로그램이다. 지난 1년간 서울중앙지법에서만 567명이 참가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관계자는 "우리 단체에서 만든 국민참여재판 방청 모임에 지금까지 350여명이 함께했다"며 "80%는 로스쿨·사법고시 준비생이고, 작가 지망생, 자영업자 같은 일반인도 눈에 띈다"고 말했다.

입시 학원에서 '법과 사회' 과목을 가르치는 민준호(35)씨는 4년 전부터 법정에 왔다. 민씨는 방학 때마다 인터넷 강의를 듣는 청소년 20~30명을 모아 형사 공판을 보러 다닌다. 민씨는 "법정은 사회의 양극단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라며 "공부 잘해서 사회 엘리트가 된 판·검사와 범죄를 저질러 인생의 밑바닥을 친 피고인을 지켜보며 아이들이 많은 걸 느끼더라"고 했다.

"지방 수강생들도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올 만큼 반응이 좋았는데,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를 구하려고 아버지를 죽인 '존속살해' 사건 공판을 보러 갔을 땐 모두 펑펑 울었어요. 무심한 국선변호인에게 충격을 받기도 하고요."

7일 서울중앙지법을 찾은 노병수(68·신림동)씨는 "시간 때우기에 재판 방청만 한 것도 없다"고 말했다. 노씨는 "은퇴한 동네 친구를 통해 재판 재미를 알게 됐다"며 "특히 형사 재판에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녹아 있어 흥미롭다"고 말했다.

인터넷에는 "법학도 친구의 추천으로 여자 친구와 데이트 삼아 부산고법에서 '부부 강간' 사건을 방청했다"는 후기에서부터 "범죄 수사물을 좋아해 재판을 보고 싶은데 방청은 아무나 할 수 있나요?" 하고 묻는 글도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는 '석궁 테러 사건'의 공판 기록을 전문가 수준으로 분석한 홈페이지도 등장했다. 일본에서는 재판 방청기를 각종 잡지 등에 기고하는 '법정 프리랜서'라는 직업이 생겨났고, '방청 마니아'를 다룬 드라마도 제작됐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최근에는 법원 출입 기자나 사건 관계자도 아닌 것 같은 사람이 법정에 와서 유심히 지켜보는 경우가 자주 있다"며 "때론 감시받는 기분도 들고, 대형 사건일 경우 방청석에서 고함과 욕설이 들려오기도 하지만 사회가 더욱 투명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