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맞아 자동차 운전수, 보트 장사 등 각종 직업군을 탐방해 쓴 ‘그들의 봄 타령’ 기획 시리즈 기사 5회에 등장한 ‘유행가 범람시대’. 당시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레코드사 전속 가수들의 이야기를 담았다.(1934년 4월 18일자)

"요사이 웬만한 집이면 유성긔를 노치 안흔 집이 업스니…집집에서 유성긔 소리에 맞추어 남녀노유의 '기미고히시'라는 노래의 합창이 이러난다.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그리워한다는 말인지? 부모처자 모다 '기미고히시-'라니, 여긔에는 오륜삼강을 찻지 안해도 조흘가?"

조선일보 삽화가 안석영이 1929년 9월 1일자 '일요 만화'에서 유성기(축음기)로 인한 가정의 '노래 열풍'을 풍자한 글이다.

특히 그해부터 조선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축음기계의 획시대적 발명품'인 '전기식 축음기'는, 소리가 '실연(實演)과 추호의 차이가 업다 하며, 청자(聽者)로 하야금 분별할 수 업는 정도'였기 때문에(1929년 12월 22일자), 더욱 급속도로 보급됐다. '빅타' '콜럼비아' 등 축음기·레코드 회사들은 판매전의 일환으로 청년회 등을 끼고 전국에서 축음기 혹은 레코드 '음악 대회'를 개최했고(1930년 3월 23일자 등), '레코드 남매전(濫賣戰)'까지 펼치면서(1932년 5월 29일자) 대중가요 시대를 활짝 열었다.

'모던 껄' 둘만 모이면, "밤중 삼경 오경에 세상이 떠나도록 쇠되인 목청으로 잡소래를 높히" 불러 젖히는 바람에, "라듸오 방송국이나 축음긔 회사에서 다른 방책을 쓰지 안으면" 낭패를 볼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정도의(1930년 1월 19일자) 인기였다.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레코드와 유행가에 대한 관심을 촉발한 이래, 불과 몇 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1932년 7월 경성공회당에서 빅타, 콜럼비아 등의 '축음기상 조합' 주최로 열린 '레코드 연주회' 프로그램 36곡 가운데, 우리 노래는 '신아리랑','황성의 적(跡)','슬은 눈물인가 한숨이런가' 등 5곡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일본 노래거나 외국곡.(1932년 7월 2일자)

그러나 그해 처음 발매된 이애리수(李愛利秀)의 '황성의 적(황성 옛터)'은 무려 5만장이나 팔리면서, 대중가요 시장을 급팽창시켰다. 빅타와 콜럼비아의 양파전이던 레코드 판매전엔 시에론, 포리돌, 태평, 오케 등이 차례로 가세, 1933년 들어선 6개 회사가 조선 음반시장을 놓고 각축전에 돌입했다.(별건곤 1933년 11월 1일자)

이에 따라 "백화점의 '라우드 쓰피커'로부터 담배가게의 좁은 이마에까지 전기 '레코드'를 방송치 안코는 상법 위반에나 걸릴 것처럼" 노래를 틀어댔고, "백주대로에서도 젊은이들은 임자업는 노래 소리들을 큰 소리로 화답해가며, '아스팔트' 우헤 가벼운 '딴고 쓰텝'을 그리고", 체면을 지키는 젊은 여인들도 "전차를 기두리는 그들의 '하이힐' 구두는 용하게도 남의 눈을 피해가며 그 박자에 따라 가볍게 방아를 찍코" 있는, '유행가 범람시대'를 몰고왔다.(1934년 4월 18일자)

'장백산인(이광수)'은 이 범람하는 '유행가'를 '전염병'이라며, "근년에 조선에 유행되는 가요는…'부어라 먹자 두들겨라'식이 아니면 주색의 방종한 향락을, 검열관이 허하는 한에서 고취하는가 십흔 것들…"이라고 비판했다.(1934년 4월 19일자) 그럼에도 대중가요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