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은 크지 않았다. 서울 종로구 공안과 골목 후미진 곳에 자리한 작은 음악감상실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내 젊은 날이 시작됐다. 그와 함께 '통기타 문화'도 시작됐다. 내 마음속에서 통기타 문화 원년은 1968년이다. 그 해, 조영남은 TBC '쇼쇼쇼'에 출연해 '딜라일라'를 불러 일약 스타가 됐다. 트윈폴리오가 결성됐고, 뒤이어 한대수가 '물 좀 주소'를 부르며 한국 정서가 듬뿍 담긴 포크송의 시대를 열었다.
통기타 한 대 들고 무대에 오른 우리들은 당시 기성세대에게 낯선 모습이었다. 무대라면 마땅히 악단이 있어야 하는 줄로만 알던 때였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너무 단출했다. 하지만 감성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전달한 우리의 음악에 많은 이들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통기타 문화는 단지 음악에만 한정된 문화가 아니었다. 소설가 최인호와 감독 이장호, 만화가 고우영, 화가 정찬승, 전위예술가 정강자 등 여러 분야에서 같은 생각을 공유한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활동했다.
세시봉에 이어 명동 '오비스 캐빈' 시대가 이어졌고, YWCA '청개구리' 모임에선 김민기 서유석 등이 모여 의식 있는 포크송을 만들었다. 그리고 1970년대, '투 코리안스' '쉐그린' '4월과 5월' '투 에이스' '에보니스' '둘 다섯' 등 포크 듀엣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어니언스'를 통해 비로소 통기타 문화는 단지 젊은이들의 문화에서 벗어나 한 사회의 문화로 지평을 넓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대마초 파동을 겪으며 통기타 문화는 갑작스런 단절을 겪었다. 4년 뒤에야 통기타 문화 주역들의 활동 금지가 전면 해제됐지만, 이미 시간은 많이 흘러 있었다. 통기타 문화는 자연히 잊혀졌다. 그와 함께 통기타 문화에 공감했던 이들도 자기 추억을 잊어갔다. 추억을 곱씹기엔 너무 바쁜 시간이었다. 우리 세대는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온 세대다. 정치적 격변을 뚫고 경제 성장을 위해 바지런히 애써 온 세대다. 간혹 통기타 문화가 재조명되긴 했어도 우리 세대에게는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010년 한 TV 프로그램에 송창식 조영남 김세환과 함께 출연했을 때 비로소 잊혀져 가던 통기타 문화가 큰 관심을 모았다. 그와 더불어 우리 세대는 자신의 추억을 되찾았다. 늘 공연장에서 하는 말이 있다. "이 공연은 추억의 보석상자"라고. 세시봉 공연은 묻어두고 덮어뒀던 추억의 보석 상자를 열어, 먼지 쌓인 보석을 하나하나 닦아내며 자기 추억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반추하는 자리가 됐다. 그 무대에 내 역할이 있다는 것, 오늘날까지 그 세대 앞에 서서 노래할 수 있다는 것, 아직도 내 노래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더 기쁜 소식은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까지 호응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통기타 문화의 공동체 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 내가 1만원을 가지고 있으면, 그 돈은 나의 돈이 아니라 우리의 돈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노래도 기꺼이 나눴다. 나는 '길가에 앉아서' '화가 났을까'를, 송창식은 '사랑하는 마음'을, 이장희는 '비'와 '좋은 걸 어떡해'를 김세환에게 아무런 사심 없이 선물했다. 누군가 녹음하는 날이면 모두가 나타나 밤새 함께 노래를 만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지켜 온 40년 우정이, 그 아날로그 정서가 디지털 세대의 마음을 끌었다.
이제 반년 가까이 연재한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를 여기서 끝낸다. 그 시절의 추억을 더는 들려줄 수 없지만, 앞으로도 '세시봉 정서'가 세대 간 소통과 화합의 통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