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상 논설위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이명박 대통령만큼 눈앞이 아찔했을 사람이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김 위원장 사망 이후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밀려드는 불확실성에 시간 단위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박 위원장과 안 원장, 그리고 다른 대선 주자들은 '김정일 사망 이후'라는 상황이 차기 지도자에게 묻는 질문에 답을 준비해야 한다.

정치권은 김정일의 사망이 내년 총선과 대선이란 자기들 미래에 미칠 영향을 두고 주판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북한 변수'가 누구에게 얼마나 유리하고 누구에게 얼마나 불리하게 작용할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여권은 안보 이슈가 부각돼 보수층이 결집하기를 바라고, 야권은 남북 불통(不通)이란 상황이 북한 급변(急變)시에 불러오는 무력감(無力感)을 지적하며 지금처럼 반(反)한나라당 심판론이 계속되길 바라고 있다. 지난 20일 리서치앤리서치 조사에선 국민의 47.6%가 김정일 사망이 내년 선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한나라당에 유리(23.2%), 민주통합당에 유리(19.9%)할 것이란 응답은 소수였다. 정치학자들도 북한 문제가 내년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보수층 결집을 기대하거나 북한 문제가 현 정부 심판론을 덮지 않길 기대하는 정치권의 계산보다 지금 한반도 상황은 훨씬 냉엄하다. 정치권은 1994년 김일성 사망과 두 차례의 북핵(北核) 위기, 작년의 천안함·연평도 도발 같은 국면에서 친미(親美)냐 반미(反美)냐, 대북 원칙론이냐 햇볕정책이냐 같은 싸움으로 허송세월했다. 새 정권이 출범하는 2013년 이후에도 이 수준이라면 국제정세에 까막눈이 되어 외세에 우리 운명을 맡기다 식민지배와 분단을 맞이했던 100년 전 오류를 되풀이하고 말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역학(力學)을 꿰뚫고 우리 역량을 최대로 끌어올릴 리더십이 필요하다.

향후 5~10년 한국을 이끌 대통령과 권력집단이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한국의 운명도 바뀔 것이다. 그 시작은 내년 선거에 참여하는 국민의 손끝에서 나온다. 그러나 아직 박 위원장과 안 원장이 외교·안보에서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판단할 근거가 별로 없다. 그나마 박 위원장은 한·미 동맹을 중시하고 현 정부보다는 대북정책에 유연성을 보일 거라는 입장을 밝혀왔다. 집권당의 대표로서 앞으로 검증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안 원장은 "안보는 보수적"이라고 밝힌 것이 전부다.

20일 아산정책연구원 여론조사에서 두 사람은 지지율에선 28%대로 차이가 거의 없었지만, 북한 위기상황에 잘 대응할 수 있는 후보를 묻는 질문에서 안 원장 지지율(13%)은 박 위원장(30%)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성공한 IT 사업가' '소통과 나눔' '상식 대 비상식'이라는 안철수식 정치가 외교·안보에선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지난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박 위원장과의 지지율 차이를 11%포인트까지 벌렸던 안 원장이 김정일의 급사(急死)라는 시험대에 선 것이다. 안 원장은 한·미 FTA를 포함해 국가적 현안에 침묵하며 논란을 피해왔다. 그렇게 지지율을 유지하다 내년에 '짠' 하고 나타나 대선에 뛰어들거나 다른 대선 주자 손을 들어줄 생각인 것 같다. 그러나 한반도 정세는 안 원장에게 침묵이 아닌 분명한 답변을 요구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