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중순 러시아 나홋카 동방 120여 마일(220여㎞) 해상. 한·러 어업위원회 협의에 따라 매년 우리 어선이 조업할 수 있는 러시아의 배타적 경제수역이다.

강원도 주문진 선적 유성호(69t)는 이날도 일몰 시각에 오징어 낚시 40틀을 투하했다. 오징어를 모으기 위해 50마일(92㎞) 밖에서도 불빛이 보인다는 집어등(集魚燈) 88개도 켰다.

오징어가 몰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멀리서 중국 어선 10여 척이 다가왔다. 저인망(쌍끌이) 어선들이었다. 유성호 최종철(57) 선장은 "그냥 주변에서 조업하려고 다가오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 어선들은 갑자기 해적으로 돌변했다. 이들은 유성호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그물을 끌고 지나가며 유성호가 모은 오징어를 저인망으로 쓸어 갔다. 한 번 지나간 것도 모자라 돌아와 한 번 더 휩쓸고 가면서 오징어는 물론 유성호 어구까지 망가뜨렸다.

유성호는 지난 8월 20일부터 10월 15일까지 러시아 수역에서 조업했는데, 9월 중순쯤 5~6차례 약탈 조업을 당해 오징어 낚시 35개씩 달린 어구 160틀(800만원)이 망가지거나 분실됐다. 최 선장은 "그다음부턴 중국 어선이 나타나면 조업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다녔다"고 했다.

이 탓에 유성호의 올해 실적은 반 토막 났다. 작년만 해도 오징어를 90t 이상 잡았지만 올해는 40여t밖에 잡지 못했다. 3억원이던 수입도 1억5000만원으로 줄었다. 1억3000만원가량의 조업 비용을 제외하고 두 달 동안 칠흑 같은 망망대해에서 고생한 선원 7명에게 돌아간 것은 250만~300만원씩 정도가 고작이다. 최 선장은 "중국 어선들이 1m 옆으로 지나갈 때는 무섭다"며 "해경도 죽이는 판인데 현장에서 충돌이라도 일어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유성호와 함께 러시아 조업을 나갔던 어령호(77t)도 같은 피해를 봤다. 지난 7월 28일부터 10월 3일까지 68일간 조업했던 어령호의 엄기찬(58) 선장은 "오징어만 모아 놓으면 달려들어 배 바로 밑까지 훑고 지나가는 통에 조업을 포기하고 일찍 돌아오는 배가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어민들에 따르면 올해 러시아 수역에 갔던 강원과 경북의 채낚이 어선 90여척 모두 중국 어선의 약탈 조업에 피해를 봤다.

올해 러시아 수역 오징어 조업 쿼터는 1만t이었지만 조업량은 5300t으로 절반에 그쳤다. 매년 쿼터량의 80~90%까지 잡았던 것과 비교하면 올해는 유독 손해가 크다. 우리 어선들은 1척당 1630만원씩 러시아에 입어료를 내고 러시아 수역에 들어갔지만, 중국 어선들은 입어료도 내지 않고 약탈 조업을 했다. 어민들은 이들 중국 어선이 북한 동해 수역으로 조업 왔다가 더 북상해 약탈 조업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