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초 파동'으로 서울 서대문 구치소에 들어온 지 100일 만에 집행 유예로 풀려 나왔다. 1976년 3월이다. 그때 이후로 내 삶은 바뀌었다.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와 해비타트 운동에 참여했다. 시간이 좀 지나선 교도소나 구치소에서 노래를 곁들인 강연 활동도 하기 시작했다. 상처를 받았던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의 영혼을 이해하듯, 갇힌 사람에겐 갇혀 봤던 사람의 이야기가 힘을 얻는다. 1년에 네 번씩 간 게 이제 30년을 넘는다.

김추자(왼쪽)와 이장희의 앨범 재킷. 1970년대 대마초 사건에 휘말려 방송·판매 금지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999년의 일이다. 당시 기독교 세진회에서 주관해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재소자를 돕는 자선 음악회가 매년 열렸다. 행사에 종종 참여하곤 했던 내가 아이디어를 냈다. 청주 여자 교도소에 중창단이 있는데 이들을 출연시키는 게 어떻겠느냐고. 처음엔 "현재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 무대에 세우는 게 말이 되느냐"며 모두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밀어붙였다. 다행히도 당시 법무부 교정국장이었던 김경한 전 법무부 장관이 흔쾌히 응했다. 그는 검사로서 교도소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중창단 인원은 17명. 한 명에 교도관 세 명이 붙었으니 총 51명의 교도관이 동원됐다. 한 명이라도 도망가면 큰일이니 온통 비상이었다. 그런 상황에 그들이 무대에 올랐을 때 감동은 형언할 수 없었다. 자선 음악회 중 그 해에 제일 많은 후원금이 모인 것으로 기억한다. 훗날 이 인연으로 김경한씨가 법무부장관이 됐을 때 나는 법질서바로세우기 홍보대사에 위촉됐고, 법무부 로고송도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그 사건으로부터 먼 훗날 얘기다. 막상 1976년 3월 집행 유예로 풀려 나왔을 때는 상황이 막막했다. 단순히 사법 처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해 1월 당시 문화공보부는 54명의 연예인 명단을 작성, 각 연예 단체가 제재 조치를 취하길 요구했고, 연예협회는 이들을 제명했다. 나를 포함, 이장희 이종용 신중현 김추자 등이 제명 처분됐다.

'사형 선고'와 마찬가지였다. 방송은 물론 일반 업소 무대에도 서지 못했다. 노래 '여고시절'로 유명했던 이수미는 백화점 여성용품 코너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매상이 오르지 못하는 속상함보다 그녀 앞에서 수군대는 말들이 더 참기 힘들었다 했다. 한 코미디언은 아예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입사 시험에 합격하고서도 '대마초 가수'라는 이유로 채용이 거부됐던 후배도, 그 사건 이후 생활의 어려움으로 지병을 치유하지 못했던 동료도 있었다. 일부 가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음성적으로 무대에 섰다. 물론 사건이 있기 전보다 훨씬 못한 대우를 받았다.

1978년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 시인 김지하 등 이른바 긴급조치 위반자 106명을 포함한 5378명에 대한 사면이 단행됐다. 하지만 그때에도 '대마초 연예인'은 예외였다.

활동 규제가 전면 해제된 것은 1979년 말이다. 4년 만에 문화공보부의 통보에 따라 활동이 허용됐다. 의협심 강한 국회의원들과 문화를 사랑하는 언론인들의 도움이 있었다. 정치인 중에선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가 구명 운동에 앞장섰고, 선우휘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카나리아에게 노래를' 등의 칼럼으로 구명 활동을 도왔다. 그러나 4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 사이 연예계 분위기는 바뀌어 있었다. 통기타 문화의 허리가 그때 끊겼다. 1970년대 초반 청년문화 기수로 인기를 누렸던 이들 대부분이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