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다음 날인 1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중경고등학교 3학년 교실. 정답을 맞춰보며 가채점을 하던 김모(18)양이 울상을 짓고 있었다. 평소 모의고사 땐 언어 영역에서 1~2등급을 받았는데, 가채점 결과를 사교육 입시 기관의 예상 등급 커트라인에 맞춰보니 3~4등급으로 떨어져 버렸다. 정부가 '만점자 1%' 난이도로 출제하겠다고 해서 그 수준에 맞춰 공부를 해왔는데, 예상보다 어려운 신(新)유형 문제들이 나와 시험을 망친 것이다. 김양은 "'쉬운 시험'이 될 것이라는 정부 말을 믿고 (언어영역의)어려운 문제를 충분히 준비하지 않고, 다른 영역을 공부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쓴 것이 실패 원인이 됐다"고 말했다.

내 점수는 얼마나… 11일 오전 대전광역시 중구 대전고등학교에서 전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고3 학생들이 수능 시험지와 답안지를 펼쳐놓고 채점하고 있다.

정부는 올 초부터 수험생들에게 '수능 전 영역에서 만점자 비율이 1%가 되도록 출제하겠다'고 밝혀왔다.

지난 2월부터 최근까지 7차례 이상 "영역별 만점자가 1%가 나오도록 하겠다"며 '쉬운 수능'을 강조했다. 이주호 교과부 장관이 직접 "난이도 (만점자 비중) 1%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이번 수능 당일 오전에도 출제 관계자가 '1%'를 공언했다.

하지만 영역별 만점자 비율이 '1%'에서 크게 어긋나면서 정부의 예고는 결과적으로 수험생들에겐 거짓이 되고 말았고, 정부의 예고를 믿고 시험준비를 해온 학생들은 당혹해하고 있다.

이처럼 수능제도가 학생을 혼란에 빠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1994년 시작된 수능은 한 해는 쉬운 수능(물수능), 다음 해에는 어려운 수능(불수능)을 반복하며 학생들을 골탕먹였다. 특히 올해는 정부까지 나서 만점자 비율을 1%로 맞추겠다고 제시했지만, 영역별로 난이도가 크게 들쑥날쑥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선 수능 입시 제도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 수능 제도가 제 역할을 상실한 채 입시생들에게 혼선만 가중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11일 수험생과 중고생 150만명이 가입한 인터넷 카페 '수만휘(수능 날 만점을 휘날리자)'에는 정부의 '실패'를 비판하는 글이 속속 올라왔다.

11일 오전 대전고등학교에서 수능을 치른 3학년 학생들이 12학년도 대입 지원가능 대학·학과 참고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재수생이라는 한 수험생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웬 객기냐. 무슨 만점이 1%냐. (수험생) 똥줄 태우려고 작정을 했나. 이제 내년에는 (올해 쉽게 낸 과목은) 또 어렵게 낼 건가"라고 했다. 또 "평가원이 수험생 가지고 노나. 가채점할 때는 점수가 높아 기뻐했는데, 등급컷(커트라인)은 확 떨어졌다. 이게 변별력이냐?" "평가원에 뒤통수 맞은 기분이다. 실제 수능에서 영역별 난이도를 이렇게 낼 거면 6월과 9월 모의평가는 왜 그렇게(쉽게) 냈나?" 등의 불만이 쏟아졌다. 한 수험생은 "왜 수능은 불수능(어려운 수능) 아니면 물수능(쉬운 수능)이냐. 중간으로 난이도를 조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애초에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약속'을 하면서 이번 사태가 커졌다고 말했다. 국가가 나서 수능의 만점자 비율 목표를 수치(1%)로 정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는 지적이 많다.

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SAT(미국) 등 많은 국가에서 국가단위의 입시를 치르지만, 우리처럼 국가가 시험 난이도를 약속하고 또 그 시험 성적 0.01점으로 대학 합격 당락이 좌우되는 곳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며 "학생들의 능력이 해마다 다를 수도 있는데, 무조건 만점자 1%로 난이도를 맞추겠다는 것은 정부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하겠다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수능 출제 전략이 실패하면서 앞으로 상당수 학생이 진학전략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 특히 문과 계열 상위권 학생들의 혼란이 예상된다고 입시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문과계열은 '수리나'와 외국어 영역이 너무 쉽게 출제돼 변별력이 예상보다 훨씬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영덕 대성학력개발연구소장은 "문과 상위권 학생들은 성적 차이가 거의 안 나기 때문에 합격 가능성을 점치기가 굉장히 힘들다"며 "안갯속 입시 속에서 치열한 눈치작전이 예상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