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금준씨

"좋은 작품이에요. 그런데 왜 한국 디자이너인데 한글이 아니라 알파벳으로 디자인했나요? 난 (한글의) 신신명조체가 참 아름답던데…."

지난해 12월 홍콩에서 열린 국제디자인상 DFA상(Design for Asia Award) 시상식. '601 아트북 프로젝트' 포스터로 대상을 받은 한국 그래픽 디자이너 박금준(48·601비상 대표)씨에게 심사위원 미셸 드 보어(Boer)가 축하인사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박씨는 'Snell'이라는 영어 단어가 나무와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담긴 포스터로 상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한글에 관심 있었던 네덜란드 출신 심사위원의 눈엔 한글이 주(主)소재로 쓰이지 않은 게 의아하게 보였던 것이다. 보어는 비교적 최근 글꼴인 '신신명조체'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다.

박씨는 그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한글을 테마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가까이 흐른 지난달 29일.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열린 '중국국제포스터비엔날레'에서 박씨는 한글을 소재로 만든 '한글. 꿈. 길'이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다.

2003년 시작된 이 상은 세계적인 그래픽 디자인상으로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니클라우스 트록슬러 등 이 분야를 이끄는 거장들이 역대 수상자일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한국인 대상 수상은 박씨가 처음. 한글 덕에 박씨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독창적인 타이포그래피"라는 호평을 받았다.

"외국에선 조형적인 글로 꼽히는 한글을 우리 디자이너들이 촌스럽다며 방치하고 있다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3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박씨는 "그동안 한글은 해외에서 소통하기 어렵고 폼나지도 않은 것으로 여겨져 저를 포함한 대부분 디자이너들이 주로 영어로 작업했는데 편견이었다"며 "1년 동안 한글에 푹 빠져 살았다"고 했다.

지난달 29일‘중국국제포스터비엔날레’에서 대상을 탄 박금준씨의 작품 '한글. 꿈. 길'. 타자기를 분해해서 나온 부품을 조합해 한글 형태를 만들었다. 왼쪽에 옆으로 누운 '한글꿈길'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박씨는 세계 3대 디자인상으로 꼽히는 '레드닷상'과 'iF상'을 각각 12차례 받고 지난달 정부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받은 한국의 대표 그래픽 디자이너다. 여수세계박람회 포스터,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홍보물 등을 디자인했다.

충격은 자성(自省)을 넘어 책임감으로 이어졌다. "디자인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서 한글의 아름다움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일조해야겠다 마음먹었어요."

문제는 한글의 조형미를 어떻게 잘 살리느냐는 것이었다. "한글을 응용한 작업들이 대체로 한글 음운(音韻)을 조합해 사물에 적용한 것이었어요. 저는 거꾸로 생각해봤습니다. 우리 일상 속 사물로 한글 형태를 만들어 보기로 한 거죠."

피아노 부품으로 한글‘꿈’을 형상화한 작품. 관절이 연결된 듯한 모습이다.

고철 더미 속 철사, 오래된 타자기, 낙엽…. 주변 사물을 그러모았다. 이번 수상작은 타자기, 색소폰, 벽시계를 분해해서 얻은 부품을 조합해 '한글. 꿈. 길'이라는 한글 형태를 만든 것이다.

라이트박스(아래로부터 불빛이 올라오는 조명상자) 위에 부품을 배치한 뒤 촬영했다. 얼핏 보면 한글이 잘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글 자모가 드러난다. 자동차 부품으로 만든 한글 '길' 모양 설치물, 피아노 부속품으로 만든 '꿈' 모양 작품도 있다. "한글은 아래로도 관계를 가지고 옆으로도 관계를 가지고 있어 디자인적으로 흥미로운 소재"라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그는 "나뭇잎, 달, 산 등 자연의 형상에서 한글을 포착해 내는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라며 인터뷰가 끝나자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낙엽 뒹구는 가을 거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