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박원순 서울시장의 등장 배경에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총체적인 민심이반(離反)이 자리한다. 서민들의 삶이 어려워지면서 '경제대통령'의 구호는 퇴색된 지 오래다. MB정부의 공적 신뢰도는 '내곡동 사저(私邸)' 의혹으로 치명타를 맞았다. 공정성이 생명인 국가공동체의 수장(首長)이 사적 이익을 위해 편법을 마다치 않는 행태가 공분(公憤)을 산 것이다. 청와대가 그렇게 누추한 발상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악할 만한 일인 데다, 대통령의 안이한 해명은 MB정부가 민심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증명한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돌출사퇴로 인한 보궐선거가 여당에 필패(必敗)의 구도였다는 걸 감안하면 나경원 후보는 선전한 셈이다. 어쨌든 이번 선거결과가 상징하듯 태풍이 몰아치는 '정치의 계절'이 내년에 만개(滿開)할 게 분명하다. 기득권층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 미래에 대한 불안, 현 사회상황에 대한 불만이 모인 불신·불안·불만의 3불(不)사회가 총체적 분노사회로 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구(舊)체제에 대한 분노와 새 정치리더십에 대한 열망이 민심을 격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은 '시민정치의 승리'로 상찬(賞讚)되기도 한다. 시민이 주인이 되는 생활정치의 본격화라는 이유에서다. 일생을 공적 가치에 헌신한 그의 이력이 그런 기대를 갖게 한다. 나는 '박원순 서울시'가 순항해 시민들의 주름살을 펴주기를 간곡히 소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박원순 당선'의 야누스적 얼굴도 냉철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시민운동을 대표해 온 박원순 변호사의 현실정치 투신이 한국민주주의의 진화에 부정적 여파를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근·현대화의 흐름은 곧 시민사회가 국가와 정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이었다. 이는 동시에 시장(市場)으로부터 독립된 시민사회의 출현과 궤를 같이한다. 한마디로 국가와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운 시민사회는 현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인류 보편사적 중요성을 지닌 통찰이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시민사회의 중요성을 재확인한 바 있다. 최근 중동 민주혁명의 경우에도 시민사회가 있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국가 사이에 민주화 운동의 추이가 크게 다른 걸 볼 수 있다. 한반도의 남(南)과 북(北)의 행로에 결정적 차이가 생긴 요인도 역동적 시민사회의 존재와 부재의 대비로 설명 가능하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와 같이 발전했다. 시민운동이 국가와 시장을 적절히 견제할 때 민주주의도 건강해진 것이다. 동시에 우리나라는 팽배한 정치결정론이 다른 모든 영역을 빨아들이는 막강한 전통이 있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인물들이 마지막으로 정치에 투신해 망가지는 오래된 광경에서 보듯 한국 특유의 정치 중심주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는 국가·시민사회·시장 사이의 상호견제에서 비롯된 현대적 삶의 질서가 한국적 정치만능론 때문에 위협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진보적 시민운동 진영이 총동원되어 현실정치의 당파적 주체로 나선 지금의 상황은 시민사회가 정치에 흡수되어버리는 한국적 '소용돌이 정치'의 재판(再版)이 될 수도 있다. 국가와 정치가 시민사회를 포함한 다른 모든 영역을 흡수하는 블랙홀 현상이 재현되는 셈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치적 성공은 미래의 다른 시민운동가에게도 "앞으로 정치할 거냐?"란 질문을 불가피하게 할 것이다. 박 시장의 정치적 입신(立身)이 진보진영에 지금은 희소식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시민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좋은 뉴스가 아닐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한국 시민사회에 좋은 뉴스가 아니라면 한국민주주의의 장기적 전망과 관련해서도 희소식이 아닐 터이다.

독립성을 잃은 시민운동은 지속 불가능하며, 대다수 시민들은 신뢰를 거두어들일 것이다. 시민운동은 현실정치와 비판적 긴장관계를 유지해야만 시민운동다울 수 있다. 지금은 '서울시장 박원순'의 찬란한 빛에 가려 있지만 현실정치인이 된 '시민운동가 박원순'의 그림자는 너무나 크다. 그 결과 '박원순 이후'의 시민운동이 순수성을 주장하기는 쉽지 않게 돼버렸다. 참여민주주의의 대의(大義)를 앞세운 현실정치 참여가 오히려 시민운동을 위기에 빠뜨리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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