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주사님. 장애인협회 김○○ 간사입니다. 필요물품 구입 하나 해주십사 전화드렸습니다. 과에서 많이 쓰시는 걸로 하나만 도와주시면 추운 겨울 장애인들에게 정성을 다해 따뜻한 밥을 대접하겠습니다."

지난 11일 경기도 의정부의 한 동 주민센터 안모 회계주사는 이 말을 믿고 녹차와 문구용품 등 27만원 상당의 물품을 구입했다. 물론 동 주민센터 예산이 쓰였다. 안 회계주사는 "시가보다 비쌌지만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들에게 쓰인다고 해 의심 없이 믿고 구입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물품을 판매한 김모(45)씨는 "이름만 장애인협회지, 실제로는 사기단체"이며 "월 매출이 1000만원을 넘는다"고 했다. 장애인 단체를 사칭해 부당 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이 업체는 6년 전부터 전국의 관공서를 대상으로 물품을 판매하고 있다. 물건을 판매할 때는 장애인협회라고 하지만, 홈페이지나 건물에 간판조차 없다. 김씨는 "장애인 사업자등록증은 양주시의 한 장애인단체 대표의 이름으로 등록했다"며 "사무실에는 책상 5개와 물품들이 쌓여있을 뿐"이라고 했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이 업체에는 관공서에 전화를 걸어 물건을 파는 텔레마케터 5명이 근무한다. 업체의 대표는 같은 건물에서 인력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임모(62)씨. 임씨는 생활정보지에 파출부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낸 뒤, 일을 잘하는 여성에게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전화로 물건을 팔면 판매대금의 40%를 주겠다"고 말해 텔레마케터로 고용했다. 임씨의 아들과 며느리, 올케도 함께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텔레마케터들은 서로 가명을 쓰며 '간사'라고 불렀다"고 했다.

텔레마케터들은 전국을 나눠 담당지역을 정한다. 그 후 각 지역의 동 주민센터, 구 의회, 구청 등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회계 담당자 연락처를 파악한 뒤 전화를 걸어 물품을 팔았다. 김씨는 양양, 창원, 의정부, 연천, 고흥 등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들이 파는 물품은 관공서에서 필요한 녹차, 종이컵, 핸드타월, 각 티슈, 행정봉투 등 다양하다. 김씨는 "1000원에 사온 녹차를 5000원에 판매하는 걸 포함해 대부분 시가보다 4~5배는 비싸게 판다"며 "가격이 비싸다고 하는 공무원에게는 '생산능력이 없는 중증 장애인들이라 물건을 협찬받기 때문에 다소 비싼 점을 이해해달라'고 얘기한다"고 했다.

이들은 전국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지역번호가 찍힐 수 있는 일반전화 대신 인터넷 전화를 사용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김씨는 "일부 공무원들은 자신의 지역이 아니면 도와주는 것을 꺼린다"며 "이 때문에 지역을 알 수 없도록 인터넷 전화를 사용하며, 의심하는 공무원에게는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그렇다'고 말한다"고 했다. 김씨는 또 "검찰과 경찰에는 전화를 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매주 월요일에는 회의도 했다. 김씨는 "매주 월요일 회의 때 성과를 높이라고 계속해서 얘기했다"며 "뿐만 아니라 공무원들이 물건을 구입하게 하는 효과적인 멘트에 대해서도 교육을 했다"고 했다. 김장철에는 '사랑의 김장나누기 행사를 합니다'라고 하고, 추운 겨울에는 '사랑의 연탄 나누기, 한 계좌만 도와주세요' 등 계절마다 멘트를 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업체는 그간 도움받는 주체도 청각장애인, 시각장애인, 지체장애인 등으로 수시로 바꿨다. 수개월 전 이 업체가 소속돼 있다고 했던 단체 관계자는 "물품 판매 사업은 결코 있을 수 없다"며 "단체와는 관련이 없다"고 했다. 김씨는 "사장은 수년간 매달 1000만~2000만원의 매출을 내며 봉사활동이나 기부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김씨는 또 "업체를 경찰서에 신고했다"며 "잘못된 행위에 가담한 데 대해 처벌받을 각오도 돼 있다"고 했다.

이 업체 대표 임씨는 "장애인단체는 아니고, 단체의 후원회"라며 "매출은 한 달에 1000만원 정도 돼도, 텔레마케터 월급 주고, 운영비 쓰고 나면 장애인단체에는 한 달에 50만~100만원 정도 들어간다"고 했다. 임씨는 또 "공무원들에게 곧이곧대로 장애인단체가 아닌 후원회라고 하면 물건을 사겠냐"며 "텔레마케터들이 자원봉사자라고 속인 건 사실"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임씨는 "세금을 철저히 내며 사업을 했다"며 "함께 일했던 김씨를 무고, 절도,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고 말했다.


[포토] 장애인 인권보장 근본 대책 정부에 촉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