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을 당기는 순간에는 과녁만 보여요. 긴장 속에서 바라보는 과녁은 어느 순간 꼭 도달해야 할 간절한 염원의 화신이 되죠.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는 시간."

활을 들어 겨냥하는 사이 5초에서 10초 정도 흐른다. 마침내 손이 시위를 놓으면 2초 후 과녁을 때리는 '탁' 소리가 울린다. "나와 과녁이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순간"이라고 했다.

남들은 은퇴할 때 국궁에 입문한 김형국 교수가 29일 서울 사직동 황학정에서 활을 쏘고 있다.

신간 '활을 쏘다―고요함의 동학(動學), 국궁'(효형출판)의 저자 김형국(69) 서울대 환경대학원 명예교수. 지난 2006년 발간됐다 금세 잊혀진 책을 최근 영화 '최종병기 활'의 인기에 힘입어 재출간했다. "영화 덕분에 활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니 감사한 일이지요. 영화에 나오는 과녁이 내 책을 보고 고증한 거라고 하더군요."

이순(耳順·60세) 무렵에 국궁(國弓)에 입문한 그는 "활을 쏘면서 자연스럽게 문헌들을 뒤져보다가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했다. 활쏘기의 사회문화사를 종합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책이다. 고대 중국의 병서와 조선시대 문헌을 훑으며 우리 활의 역사를 짚어내고, 현재 국궁 문화의 현장을 꼼꼼히 기록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 '수렵도'에 나오는 활을 보면 지금 각궁의 활 모양과 똑같아요. 시위를 얹으면 두 봉우리가 이어진 큰 산 혹은 알파벳 'M' 대문자가 퍼져 있는 모습이죠. 서양 활은 반원으로 굽어질 뿐인데, 우리 각궁은 변곡점(變曲點)이 5개니까 추력이 더 많이 생기는 겁니다."

후기 구석기 시대에 생겨난 활은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보편화됐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유적지에서 화살촉이 많이 출토되는 것, 예부터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족이라 칭했던 것은 우리의 빼어난 활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그는 말했다. "흔히 중국인은 창, 일본인은 칼을 잘 쓰고 한국인은 활을 잘 쏜다고 하는데 이때의 활이 편전(片箭)"이라며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주인공이 쏜 애기살이 바로 편전"이라고 했다. 대나무를 반으로 쪼갠 통아(桶兒)에 화살을 넣어서 쏘는 편전은 보통 화살(70~80㎝)의 절반 길이밖에 되지 않고, 관을 통해서 나가기 때문에 더 멀리, 정확하게 맞힐 수 있다고 했다.

중국은 창, 일본은 칼, 한국은 활의 나라였다. 사진은 권무석씨가 만든 각궁(角弓)과 그가 수집한 각종 화살들.

활과 관련된 역사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정조는 50대 화살을 쏘아 49대를 명중시킨 신궁이었다. "50발 전부를 맞혔다는 기록은 없어요. 49발을 명중하면 마지막 화살을 허공에 쏘거나 풀숲으로 쏘았어요. 완벽한 경지에 이르면 다음은 그보다 못할 수밖에 없으니까 일부러 화살을 빗맞혔던 겁니다."

그는 "충무공의 활쏘기는 '동고동락(同苦同樂)'의 리더십"이라고 했다. '난중일기'에는 활쏘기에 관한 기록이 270여 차례나 나온다. 왜란이 일어난 그해 3월 28일자에 한 순(巡)에 다섯 발씩, 열 순을 쏘아 42중을 했다고 적었으니, 요즘 기준으로 하면 궁도 8단을 넘는 경지의 궁력(弓力)이었다. 그는 "충무공은 활쏘기를 전투훈련뿐 아니라 놀이로 활용했다"며 "놀이를 통해 친목을 다지는 오늘의 골프 모임처럼, 엄격한 계급 사회 속에서 장군과 부하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소통의 창구였다"고 했다.

이 땅에서 활의 무기 구실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신뢰성에 금이 간다. 일본은 주력 무기를 활에서 조총으로 바꾸었지만, 우리는 엄청난 전란을 겪고 나서야 활의 전투 능력이 더 이상 믿을 것이 못된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다. 활은 전신을 노출시켜야만 쏠 수 있지만 조총은 나무 뒤에 숨어서도 쏠 수 있는 신무기였다. "하지만 해전(海戰)에서는 여전히 유효했지요. 이순신 장군이 왜군한테 크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활의 위력 덕분이었습니다. 해전에서는 굳이 몸을 숨길 필요도 없고, 조총의 유효 사거리는 60m 정도인데 활의 유효사거리는 150m라 훨씬 정확하게 멀리 날아갔으니까요."

만각(晩覺)이지만 활은 쏠수록, 배울수록 묘미가 있다고 했다. 2002년 처음으로 활을 잡았으니 벌써 10년째이다. "가까운 벗인 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이 '스트레스 해소에 이보다 좋은 게 없다'며 여러 차례 권유하더군요. 골프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 뒤늦게 용기를 냈는데, 활을 쏘면서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됐어요." 현재 국궁 인구는 전국에 3만명 정도. 요즘도 매일 서울 사직동 황학정(黃鶴亭)에서 '활을 낸다'고 했다.

전공은 도시계획학이지만 음악·미술에도 두루 관심이 많다. 화가 장욱진의 전기까지 썼다. "제가 특이한 게 아닙니다. 예부터 선비는 말도 타고 글도 쓰고 다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서울대 문리과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대학 교육은 직업 교육이 아니라 교양 교육이었죠."

그는 "활을 쏜다는 것은 몰아(沒我)와 집중의 미학"이라고 말했다. "스트레스가 아무리 많아도 활을 쏘고 나면 머리가 맑아집니다. 고도로 집중하면 나 자신이 없어지는 경지에 이릅니다. 무심의 극치는 거꾸로 전심의 극치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