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문화부 차장

'공고(工高) 학생들이 쓴 시'라는 부제가 붙은 시집 한 권이 도착했다. 제목은 '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나라말 출간).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읽어보니 이렇다. '담임은 울보다/ 우리가 쪼금만 잘못해도 운다/ 다른 선생님 시간에 떠들어도 운다/ 대들다가 울면 우리만 불리해진다/ 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김동진 '울보 담임' 전문).

이 시집을 묶은 학생들은 류연우 등 77명이다. 이 '공고생 시인'들은 "솔직히 공부를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아 수업시간이면 딴짓을 하거나 잠을 자는 때가 많았는데 시를 쓰면서 마음속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얼마 전 1억원 고료 조선일보 뉴웨이브 문학상의 원고 마감이 있었다. 그런데 마감이 지난 후에 라면상자 크기의 박스 하나가 우편으로 도착했다. 처음에는 잘못 배달된 편지인 줄 알았다. 곰돌이 캐릭터가 그려진 편지가 100통 가까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그 편지들은 계통도, 맥락도 찾기 힘들었다. 수신인도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들, 딸, 그리고 자기 자신 등 제각각이었다. 한참을 뒤진 끝에 기자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을 찾았다. 연필로 거칠게 썼고, 철자법도 조금씩 어긋난 악필(惡筆)이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저는 그리 많이 배우진 않았습니다. 일기장에 쓴 것도 아니고, 매일 견출지·편지지에 조금씩 썼습니다. 제가 직장을 다니니까 아이들이 상한 것 먹을까 봐 냉장고 반찬통에 요일과 메모를 하며 25년을 살았습니다. 그때 함께 쓴 메모랑 편지들입니다. 저는 힘들 때 가족만 생각하면 힘이 번쩍번쩍 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두서없이 편지를 적습니다. 글을 쓰면서 행복했습니다."

문학상 마감을 치를 때마다 이런 원고들이 도착한다. "내 인생을 글로 엮으면 대하소설(大河小說)"이라는 하소연에 어울릴 작품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객관성이 떨어지는 데다 개인사에 국한된 사연들이라서 당선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공고생 시인'과 '엄마 소설가'의 글쓰는 밤을 상상해봤다. 낮에는 치킨집 오토바이 배달을 하고, 밤에는 콩나물 반찬통에 날짜를 적은 뒤 식탁에 앉아 스탠드를 켜고 하루를 정리하는 삶이다.

서양에는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표현이 있다. 전문적인 소설가가 아니라 보통 사람이 식탁에 앉아서 쓴 소설이라는 뜻이다. 정말 100만분의 1 확률로 '해리포터'의 저자 조앤 롤링처럼 세계적인 소설가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독자가 자신뿐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시집과 편지를 읽으며 다시 한 번 글쓰기의 첫째 존재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치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가 김연수는 신인작가 시절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공고생 시인과 엄마 소설가는 시와 편지를 쓰며 행복했다고 했다. 문학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