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손을 꼭 잡은 커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홀로 400m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10초 이상. 시속 240km 이상의 속도로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혔고, 부서졌다.

한 여성은 죽음을 수초 앞둔 추락의 순간에도 바람에 들려 올라가는 스커트를 아래로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일부는 커튼이나 테이블보를 움켜쥐고 낙하산처럼 활용해보려 했지만, 천 조각을 쥔 사람의 손아귀 힘은 추락에 따른 엄청난 힘을 이겨내지 못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9일 ‘미국이 잊고 싶어하는 9·11 희생자, 200인의 점퍼들(jumpers)’이라는 기사에서, 비행기 충돌로 발생한 극한의 고온과 유독 가스를 견디지 못하고 쌍둥이 빌딩을 뛰어내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집중 조명했다.

신문은 “공중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추락하는 투신자들의 사진만큼 9·11 당시 쌍둥이 빌딩 공격의 공포를 시각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것은 없다”고 전했다. 그들이 건물에서 견뎌야 했던 숨 막히는 연기와 먼지, 그리고 철제 구조물을 휘게 하는 열기가, '투신의 공포'조차 잊게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데일리메일은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은 9·11의 ‘잊혀진’ 희생자들”이라고 덧붙였다. 테러 직후 미국 당국과 언론들이 이들을 외면했으며, 지금도 정확한 신원이나 숫자가 파악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일부는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고 비판했다. 종교적 색채가 강한 미국의 언론들이 이들을 일종의 ‘자살자’와 똑같이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신문은 “공식적으로 9·11 당시 투신자 수는 0명”이라며 이들의 이야기를 들춰내기 시작했다.

대학교 직원 잭 젠털(Gentul)씨는 10년 전 쌍둥이 빌딩 남쪽 건물 97층에서 걸려온 부인 에일린(Alayne·당시 44세)의 전화를 잊지 못한다. 그는 “아내가 연기 때문에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무섭다’고 했다. 아내는 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여보 괜찮을 거야’라고 다독였다”고 말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에일린의 시신은 쌍둥이 빌딩 길 건너편에서 발견됐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잔해가 쌓인 위치보다도 훨씬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잭은 쌍둥이 빌딩에서의 투신을 일종의 ‘현실 도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에일린은 아주 실용적인 사람”이라며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었다면 그런 선택을 했겠느냐”고 짜증을 냈다.

은행 투자자 리처드 페카렐로(59)씨는 청명한 10년 전 9월 11일 아침, 사무실에서 강 건너 쌍둥이 빌딩에 두 번째 비행기가 날아와 꽂히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건물은 그의 약혼녀 케런 주디씨가 일하는 증권사가 있는 곳이었다.

리처드는 케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불통이었다. 그리고 연인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수주가 흘렀다.

어느 날, 그는 인터넷에서 투신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던 중 문득 케런이 뛰어내렸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됐다. 매일 '주름 개선 크림'을 바르던 케런이, 화염에 자신의 얼굴이 상하는 상황을 참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그 길로 투신자들의 사진을 여럿 찍어 보도한 AP통신의 사진 담당 리처드 드루 기자를 찾아가 "찍은 사진을 모두 보여달라"고 졸랐다. 드루 기자의 사진 파일을 뒤지던 리처드의 눈은 연속으로 촬영된 두 장의 사진에 고정됐다. 크림색 바지에 파란 셔츠, 케런이었다.

첫 번째 사진 속에서 케런은 화염이 치솟는 건물의 창가에 서 있었고, 두 번째 사진에서 그는 허공에 있었다. 리처드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겠다는 안도가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디애나주에 사는 케런의 가족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려 했지만, 케런의 가족들은 거부했다. 그들은 '투신자 0명'이라는 정부의 공식 집계를 믿는다.

비공식적으로 추산되는 투신자의 수는 약 200명. 카메라에 포착된 투신자의 수만 104명이다. 그러나 미 정부는 이어진 건물 붕괴로 인해 숨진 사망자 2753명 외에 별도의 통계를 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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