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통기타 문화는 서울 무교동에서 명동으로 옮겨갔다. 국내에 생맥주가 도입되던 무렵이었다. 명동 일대에 생맥주 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던 젊은 문화에 생맥주가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게 된 시점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오비스 캐빈'이 있었다. 통기타 문화의 메카였다. 세시봉에서 싹을 틔운 통기타 문화는 오비스 캐빈에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본래 오비스 캐빈이 자리한 건물의 주인은 자유당 시절 정치주먹으로 유명했던 이정재의 사촌 동생 이지재씨였다. 오비스 캐빈 건물 외에도 명동 퍼시픽호텔과 아스토리아호텔을 갖고 있던 그는 이 세 곳을 각각 세 아들에게 맡겨 운영을 하게 했다. 차남 이종범씨가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의 오비스 캐빈 건물을 맡았다. 한양대 음대 출신이었던 그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1960년대 중반 그곳 2층에 심지다방을 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없는 디스크 원판이 없다'는 명성을 날리며 서울 무교동, 종로 일대 음악감상실들과 경쟁을 펼쳐온 곳이다.

1970년대 포크 열풍 주역 중 하나인 가수 서유석이 오비스 캐빈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 이 사진은 서유석이 1970년 7월 내놓은‘지난여름의 왈츠’타이틀 앨범 재킷으로도 사용됐다.

1969년 당시 심지다방 관리책임자였던 김진성씨가 "통기타가 인기이니 통기타 업소로 확장하자"고 이종범씨를 설득했다. 심지다방이 지하로 내려가고 지상 3층 전체를 오비스 캐빈으로 개장했다. 1층은 경양식당, 2층은 통기타 공연이 주로 펼쳐진 코스모스홀, 3층은 그룹사운드 무대로 꾸몄다. 첫 고정출연 멤버로 트윈폴리오와 조영남을 데려왔고 훗날 3층 출연진으로 '정성조와 메신저스', 히식스의 전신 'HE-5', 신중현 밴드 등이 활약했다.

당시 고정출연 제안이 들어왔을 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비스 캐빈은 한 달 20만원을 제안했다. 대기업 신입사원 한 달 월급이 1만8000원이었고, 하루 저녁 출연료로 500원을 받을 때였다. 파격적인 대우였다. 공연장도 좁지 않았다. 4인 테이블이 30개 정도 있었다. 늘 100여 명의 관객이 우리 공연을 지켜봤다. 식사를 하지 않고 온 이들은 '비후 스텍(비프 스테이크)' '비후가스' '돈가스' '폭-찹' 중 하나를 시켜 먹었고, 맥주를 마시러 온 이들은 안주로 소시지·양배추·당근·건포도·오이 등을 버무린 '멕시칸 사라다'와 마른안주를 주로 먹었다.

오비스 캐빈은 급속도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장안에서 음악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이 다 이곳에 모였다. 훗날 양희은을 DJ로 발탁한 기독교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세븐틴'의 김진성 PD는 물론 종로 음악감상실 '디쉐네' 이종환 DJ, 명동 '시보네' 최동욱 DJ, 광화문 '아카데미 음악감상실' 박원웅 DJ 등의 아지트가 오비스 캐빈이었다. 모두 훗날 방송으로 진출해 팝 음악의 전령사로 이름을 날린 이들이다. 이종환씨는 MBC '별이 빛나는 밤에' DJ로 활동했고, 최동욱씨는 동아방송 '0시의 다이얼' DJ로 활동하다 TBC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스카우트됐으며 박원웅씨는 MBC '박원웅과 함께'를 진행했다. 이들 외에도 조선일보 이영일 대중문화 담당 기자, 일간스포츠 김유생(필명 지웅) 기자, 주간경향 서병후 기자, 한국일보 기자이자 미스코리아 대회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던 정홍택 기자가 즐겨 찾았다.

그해 TV 프로그램 '쇼쇼쇼'에 출연, '딜라일라'를 불러 일약 스타덤에 오른 조영남과 트윈폴리오를 보러 온 관객들도 빠르게 늘었다. 하루에 많게는 세 번을 공연했다. 그때마다 빈 테이블을 찾기 어려웠다. 술을 파는 곳이었으니 미성년자는 출입 금지였으되, 찾는 여고생이 많았다. 화장을 하고 사복 차림으로 찾았다. 심지어 중학생도 어른 흉내를 냈다. 여유 있는 집안 아이들은 비서나 경호원 같은 어른과 함께 왔다. 간혹 공연과 공연 사이 테이블에 불려 가는 경우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학생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고등학생이네요"라고 퉁을 놓으면 같이 온 성인이 "하도 조르니 사장님께서 데리고 갔다 오라 해서 온 것"이라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관객만 늘면 좋으련만 이곳을 찾는 친구나 후배도 많이 늘었다. 공연이 아닌 술이 목적이었다. 술을 마시고 내 이름으로 전표를 달아놓곤 했다. 한 달 월급이 20만원인데 22만원이 나온 적이 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이종범씨에게 농담 투로 말했다. "형, 나 같은 현찰 단골이 어디 있어. 고마워해." 미안해서인지 월급 받을 때 1만~2만원을 더 얹어주곤 했다.

▲8월 19일자 A23면 가수 윤형주씨가 기고하는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에서 "명동 오비스 캐빈의 건물주인 이지재씨는 자유당 시절 활동한 이정재씨의 사촌 동생"이라고 한 부분과 관련해, 고(故) 이지재씨 유족은 "이정재씨와 본관만 같을 뿐 사촌지간 등 친척은 아니다"고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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