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장군, 고생한 김에 한번 더 부탁하고 싶은데 한국군이 베트남에 가면 잘 싸울 수 있을 거야. 어떻게 생각해?"

"각하, 우리 군이 6·25 전쟁 후 훈련을 잘 받아 강군(强軍)이 됐다는 말씀은 옳지만 월남전을 절대 낙관하시면 안 됩니다."

1965년 4월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은 내 말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뜻밖이군. 채 장군 말대로라면 우린 나가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겠군." "그게 아니라 더 치밀히 연구해야 한다는 뜻…." "그러니 적임자는 임자야, 잘 연구해봐."

맹호부대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두코전투에서 승리한 9중대 2소대 이종세 상사에게 태극무공훈장을 달아주고 있다. 이 상사는 소대장이 부상을 당하자 소대를 지휘하며 월맹군을 물리쳤다. 사진 왼쪽이 채명신 파월한국군사령관이다.

대통령은 화가 나면 손을 떨었다. 거기 신경쓰여 확실히 의사를 표시하지 않은 게 나의 베트남행을 결정했다. 문제는 작전지휘권 문제였다. 대통령은 이미 브라운 주미대사에게 한국군을 미군의 지휘 아래 두겠다는 언급을 했다고 뒤늦게 말했다.

나는 버텼다. "각하, 주권국가의 군대로 파견되면서 미군의 지휘를 받으면 떳떳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용병(傭兵)이라는 누명을 쓰면 더 억울합니다." 담배를 쥔 손을 덜덜 떨던 대통령이 되물었다. "그럼 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대사는 특명전권을 갖는다. 대사에게 대통령이 한 말은 미 정부에 정식통보한 것과 같다. 고민하다 대통령에게 꾀를 냈다. "브라운에게 사령관으로 절 임명했다고 슬쩍 언급하면서 주월미군사령관에게 협조를 부탁한다고 해주십쇼!"

파병 후 나는 파월한국군사령관으로서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에게 '독자 작전권'을 갖겠다고 말했다. 예상대로 웨스트모어랜드는 '절대 안 된다'며 화를 내면서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나는 30분간 그들에게 일장연설했다.

"당신들이 B52 지원을 받아 석달동안 부락 하나 장악한 게 있나. 월남전은 정치전쟁이다. UN군이나 월남군이 지휘한다면 명분이 있지만 미군지휘를 받으면 청부전쟁이란 소릴 듣지 않겠느냐. 물론 100% 내 식대로 하겠다는 건 아니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당시 미군 지휘부 중 제일 까다로운 이가 라슨 장군이었다. 그는 6·25에 참전했었다. 그런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악수를 청해왔다. 만일 그때 우리가 독자지휘권을 확보하지 못했으면 훗날 두고두고 말썽의 소지가 됐을 것이다.

[지금도 진행 중인 '6·25 전쟁' 기억은 끝나도 기록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