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2월 13일 밤 10시.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프랑스군 진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음산한 중공군의 진격나팔 소리가 울렸다. 미 2사단 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라르(당시 60세) 중령이 절뚝이는 다리로 지팡이를 짚고 참호를 돌며 부하들에게 명했다.

"적들이 20야드(약 18m) 앞까지 오기 전에는 절대 발포하지 마라. 탄약을 아껴야 한다."

마침내 중공군들이 20야드 앞까지 다가왔다. 프랑스군 병사들의 총이 불을 뿜었다. 하지만 쏘고 또 쏴도 중공군은 끝없이 몰려왔다. 다이너마이트를 막대기에 매달고 달려들던 중공군은 5000명이나 전사자를 내고서야 퇴각했다.

몽클라르 중령이 이끄는 프랑스군 500여명과 미 23연대 장병 5500여명이 이렇게 사흘간 중공군 3만명에 맞서 이곳을 지켜냈다. 5분의 1에 불과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중공군에게 첫 참패를 안겨준 전투다. 이를 계기로 유엔군은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지평리 전투의 영웅 몽클라르 장군의 전기(傳記) '한국을 지킨 자유의 전사-나의 아버지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어로 출간됐다. 딸 파비엔느(60)가 쓰고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지평사모) 회장 김성수(68) 법무법인 아태 대표변호사가 편역했다.

6·25 지평리전투의 영웅 몽클라르 장군의 전기 한국어판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에 온 손녀 블랑시(왼쪽)와 아미시가 양평 전적지에서 주한프랑스대사관 무관인 에릭주앙(오른쪽) 대령으로부터 당시 전투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인 몽클라르 장군은 1·2차대전에 참전한 중장(中將) 계급의 백전노장이었다. 그러나 대대급은 중령이 지휘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스스로 계급을 낮춰 참전했다. 당시 딸을 임신한 부인은 반대했지만 그는 "자유를 위해 피 흘리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라며 나섰다.

지난 30일 양평군 지평면주민센터에서 몽클라르 장군의 두 손녀와 한국군 참전유공자, 지평사모 회원 등이 모인 가운데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손녀 아미시(19)는 "할아버지를 본 적은 없지만 한국전 얘기는 많이 들었다"며 "한국인들이 할아버지를 기억해주고 책까지 내줘 감사하다"고 했다. 또 다른 손녀 블랑시(15)는 "할아버지가 자랑스럽다"며 "내가 '소녀시대'의 팬이어서 이래저래 한국은 친근한 나라"라고 했다.

참석자들은 장군이 지휘본부로 썼던 양조장과 전적지를 둘러보고 충혼비에 헌화했다.

김성수 변호사는 "수없이 많은 외국 병사들이 한국의 자유를 위해 피 흘렸지만 이제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