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큰딸이 결혼할 때 양희은이 축의금과 함께 자필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그녀는 지난 40년간 '오빠'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다. '형주 형'이라고 시작하는 편지 내용은 이랬다. '형주 형, 변변히 고맙다는 얘기도 못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야 고맙다는 말씀 드려요. 장녀의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녀를 위해 암 수술비를 마련해준 일을 고마워한다는 것이었다. 본래 말 안하고 지켜온 일이었다. 그러나 지난 2월 양희은이 TV 프로그램에 출연, 그 사연을 공개했다. 그러니 이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털어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강대 재학 시절 양희은(왼 쪽).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양희은은 대입 재수생 시절 학비를 마련하고자 오비스 캐빈을 찾았고, 그곳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1970년대 후반 양희은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양희은은 아침이슬, 세노야, 네 꿈을 펼쳐라 등 여러 히트곡을 냈음에도 돈이 부족했다. 음반이 많이 팔려도 그만큼 돈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꾀를 냈다. 가수협회 등록만 돼 있으면 의료보험 혜택을 주는 제도가 막 도입된 차였다. 양희은은 등록이 돼 있지 않았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이었던 배우 신영균씨를 찾아갔다.

"양희은이 가수 활동해온 거 다 아시지 않습니까? 1년치 밀린 가수협회비를 낼 테니 등록증 만들어 주는 게 어떨까요."

일종의 변칙이었다. 전산화가 전혀 돼 있지 않던 시절이라 가능했다. 그러곤 의료보험협회를 찾았다. 당시 나는 기독교방송 '찬양의 꽃다발'을 진행하고 있었다. 전국 환자나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의료계 관련 정보를 전하는 방송이었다. 여기 출연한 인연으로 의료보험협회 홍보부장과 안면이 있었다. 그에게 말해 의료보험 적용도 문제없이 끝냈다.

마지막으로 양희은을 (내가 다녔던) 경희대 의대 부속병원에 입원시켰다. 당시 레지던트였던 의대 동기들에게 부탁했다. 2인실을 주는 대신 그 방에 환자를 더 받지 않게 해달라고. 양희은이 1인실처럼 병실을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인턴인 후배들에겐 두 명씩 조를 짜게 했다. "하루에 한 팀씩 병실을 찾아 꼭 희은이를 웃겨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후배들은 매일 내게 어떤 내용으로 웃겼다고 전화해 알렸다. 수술은 은사 목정은 박사가 집도해 성공적으로 끝났다.

양희은은 언제나 그냥 도와야 될 동생처럼 느껴졌다. 그녀와 처음 만난 건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미 문화공보원(USIS)에서 모임을 갖는 영어 동아리 '오크 클럽(Oak Club)'에서 활동했다. 경기고, 서울고, 경기여고, 이화여고 학생들이 모여 만든 모임이었다. 매주 한 번 만나 영어로 토론했다. '교복과 사복 중 어느 것이 더 적절한가', '통행금지는 사라지면 안 되나' 등의 주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임이 끝날 때면 '홍하의 골짜기(Red River Valley)'를 다 같이 불렀다. 오크 클럽 주제가였다. 나는 오크 클럽에서 발행하는 '위클리 오크' 에디터로도 활동했다.

양희은은 그 클럽의 4년 후배였다. 1968년 봄 오크 클럽 창립 기념행사가 열렸다. 그 행사에 초청받아 송창식과 함께 참석했다. 어느 정도 트윈폴리오가 세상에 알려진 시기였다. 당시 경기여자고등학교 2학년이던 양희은이 사회자였다.

첫인상이 선머슴 같았다. 당시 다른 여학교와 달리 경기여고 교복은 바지였다. 그것도 이른바 '몸뻬바지' 스타일이었다. 머리도 땋지 않고 짧게 자른 단발이었다. 말투도 당돌했다. 우리가 노래를 마친 다음의 일이다. 양희은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부르기에 앞서 무대에 아직 남아 있던 내게 그녀가 말했다. "선배님 노래 반주 좀 해주세요."

깜짝 놀랐다. 보통 여학생이라면 미리 말을 해주거나 좀 더 정중하게 부탁해왔을 것이다. 어쨌든 얼떨결에 반주에 나섰다. 그녀는 '도나 도나(Donna Donna)'를 불렀다.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노래를 무척 잘했다. 영어 발음도 정확했다. 이미 학교에선 유명한 모양이었다. 곳곳에서 박수가 터졌다. 노래가 끝나고 그녀에게 "너 대학 오거든 우리한테 찾아와라" 하고 말했다. 가수 소질이 있었다.

그녀는 2년 뒤 우리가 공연하고 있던 명동 생맥주 카페 오비스 캐빈으로 찾아왔다. 대학생이 아닌 재수생 신분이었다. 공부를 해야 했으되 돈도 벌어야 했다. 다만 그녀는 무명이었다.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송창식이 자기 공연 시간 일부를 내줬다. '포크의 디바 양희은'의 데뷔 무대였다.

["우리가 한국의 비틀스였지" 그 시절 낭만을 이야기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