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식 목포대 사학과교수

무주(광주) 출신으로 신라말 고려초 선승이었던 형미(逈微·864~917)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불교계의 새로운 동향으로 조동종 사상을 전했다. 특히 나주 지방을 정복한 왕건과 인연을 맺게 되어 철원에 올라갔다가 궁예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성과를 보면 상당 부분 다르다. 형미는 궁예와 처음부터 가까운 관계를 가졌고, 왕건과 연결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고 한다. 궁예가 전남 남부를 직접 공략하는 과정에서 형미를 만나 철원행이 이뤄졌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전남 남부 공략의 주체도, 형미와 관계를 가진 이도 왕건으로 파악해왔다.

최연식 목포대 사학과교수는 전남 강진군 무위사에 세워진 선각대사(형미)비를 포함한 두 비문을 꼼꼼하게 해석했다. 그는 궁예의 행적을 재검토한 내용을 학회지('목간과 문자' 7호, 6월 발행)에 발표했다.

기존에 파악한 내용을 보면, 태봉은 903년 금성을 공격, 나주로 개칭하고 전라도 거점으로 삼았다. 909년에는 진도 등 주요 도서를 장악했고, 910년에는 이 지역들을 뺏으러 온 견훤의 부대를 물리쳤다. 하지만 무주는 견훤군의 저항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작전의 주체는 모두 왕건이었다.

그러나 새로 밝혀진 사실은 달랐다. 태봉의 국왕 궁예는 912년 8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주와 무주 등 전라도 남부 지역을 공략했다. 그뿐 아니라 또 다른 법경대사(경유·慶猷)비문을 통해서 908년에도 궁예가 전남 남부를 직접 공략했고, 무주 근처에 은거했던 경유를 만난 궁예의 요청으로 태봉의 수도로 갔다는 점이 파악되었다.

형미는 당에서 귀국한 이후 견훤의 세력권인 무주의 실력자 왕지본(王池本)의 후원을 받아 월출산 무위사에서 자리를 잡고, 선문(禪門)을 운영했다. 이때까지 형미는 견훤과 가까운 관계였다. 하지만, 912년 궁예가 남부지역을 공략하면서 인연을 맺게돼 철원의 사찰로 이주하였다. 형미와 동문수학했던 경유의 예처럼, 궁예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두 비문은 기존 사서보다 먼저 기록된 1차자료. 이 자료들은 나주와 무주에 대한 공략계획과 지휘를 궁예가 했고, 왕건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후대의 자료들은 왕건의 역할을 실제보다 과장하여 기록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궁예에 관해서는 기성의 불교와는 다른 토착신앙과 결합된 불교사상의 측면이 강한 것으로 파악되어왔다. 하지만 궁예는 형미와 경유의 예처럼 선종 승려들에 대해 우대정책을 폈다.

특히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고 승려들을 탄압했다는 것은 형미의 비문에서 어떤 언급도 없다는 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왕건의 선종 승려들에 대한 우대는 궁예의 정책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이 왕건의 업적으로 제시하는 태봉의 남부공략은 후대에 왕건의 업적을 선양하고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궁예의 역할이 지워졌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