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정치가요?"
"아니요."
"당신은 사회운동가요?"
"아니요."
"당신은 성직자요?"
"아니요."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나는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요."

"내가 살아온 한국의 70년은 '빈 들'이었다. 이 '빈 들'은 성서에도 나오듯 '돌로 떡을 만들라'는 물질만능·경제제일주의, 악마에 절하고라도 권력만 잡으면 된다는 권력숭배사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인 기복종교에 지배되는 공간이었다…."

고(故) 여해 강원용(1917~2006) 목사가 1993년 펴낸 자서전 '빈들에서'의 서문 일부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을 위해, 해방 뒤에는 분단 극복을 위해 헌신했다. 경동교회를 설립하고 신앙 갱신으로 사회 갱신을 이루고자 사회 참여에 앞장섰다. 한국사회의 양극화 해소에 일찍이 천착했으며, 민주화 실현과 청년 리더 양성을 위해 '크리스챤 아카데미(현 대화문화 아카데미)'를 창립했다.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를 잇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구심점이었으며, 누구보다 먼저 '인간화'와 '대화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는 사랑이 시대의 어둠을 이기리라는 믿음으로, 그 어떤 불의와도 용감히 맞섰던 예언자적 목회자였다.

올해 강원용 목사의 소천(召天) 5주기를 맞아, 대화문화아카데미 여해기념사업회가 오는 18일 '여해문화제'를 마련했다.

18일 오후 5시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에서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여해포럼 : 역대 통일부 장관 초청 대화'가 열린다. 이홍구 전 총리의 사회로 김덕·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대화를 나누고 현인택 현 장관이 참석한다. 여해포럼 운영위원인 김학준 카이스트 석좌교수와 박세일 한반도 선진화재단 이사장,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 윤여준 한국지방발전연구원 이사장, 이부영 민주평화복지포럼 상임대표, 이삼열 에코피스아시아 이사장, 조형 한국여성재사단 이사장이 초청인으로 참석한다.

같은 날 오후 8시부터는 장충동 국립극장 KB청소년하늘극장에서 추모 문화공연 '사이 너머에 길이 있다'가 열린다. 정성조 빅밴드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길을 내어라'라는 제목으로 오프닝 공연을 하고, 극단 산울림이 생전의 강 목사가 자주 설교에 인용했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연출 임영웅, 출연 한명구·박상중)의 주요 장면을 공연한다.

또 강 목사와 각별한 친분이 있는 연극배우 손숙, 박정자, 윤석화가 공연하는 시극(詩劇) '별이 빛나는 길',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의 '다함께 이 길을 걸었네' 공연이 이어진다. 무용가 이정희, 남정호, 박명숙의 안무·특별출연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즉흥 춤, 몸으로'가 피날레를 장식한다. 마지막은 이어령 교수의 에필로그 '여해의 메시지와 그 유산' 강연이다.

여해기념사업회는 "강 목사님은 기억할수록 보고 싶은 사람, 답답할수록 찾아가 매달리고 싶은 사람"이라며 "아직도 빈 들에서 불안해하고 있는 우리 안의 폭넓은 사랑과 뜨거운 열정이 다시 한 번 타오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