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혈압, 경동맥협착증, 전립선 비대증, 만성 폐렴 등을 앓고 있는 김모(85·서울 서초구)씨는 동네 병원 세 곳에서 진료를 받았다. 1년 이상 치료를 받으면서 세 병원에서 각각 처방받은 약을 모두 더해 매번 12알씩 먹었다. 약을 먹는 동안 김씨는 계속 어지럼증에 시달렸다.

하지만 세 병원 중 어느 병원도 어지럼증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 폐렴 악화로 대학병원에 입원하면서 어지럼증이 그동안 먹어온 약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씨가 복용한 약에는 혈압을 낮추는 약이 4알이나 중복돼 있었다. 그래서 적정 용량을 초과한 고혈압약의 부작용으로 어지럼증이 나타난 것이다. 이후 고혈압약의 용량을 조절해 복용약을 8개로 줄이자 어지럼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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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많이 먹으니 부작용도 많아

약 먹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약으로 인한 부작용도 많이 겪는 편이다. 김씨처럼 여러 병원에서 받은 각각의 처방은 문제가 없지만, 한꺼번에 먹는 바람에 약효가 과잉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다른 병원 처방 내용을 모르고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을 실수로 처방하는 바람에 환자가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실제로 2006년 무좀약 케토코나졸을 복용하던 50대 이모씨는 두드러기 증상으로 동네 내과를 찾았다가 항히스타민제 테르페나딘을 처방받았다. 두 약을 함께 먹은 이씨는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두 약은 함께 쓰면 심장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병용금기(倂用禁忌)' 약이었기 때문이다.

빠른 효과를 보려고 많은 약을 한꺼번에 먹어서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하루라도 빨리 살을 빼고 싶은 환자에게 식욕억제제, 지방흡수 억제제, 이뇨제 등을 모두 넣어 한 번에 8∼10알씩 처방하는 비만 치료가 대표적이다.

가톨릭의대 가정의학과 김경수 교수는 "약을 많이 쓰면 오히려 부정맥, 현기증, 입 마름, 불면 같은 부작용만 커진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식품의약품통계연보에 집계된 의약품 부작용 보고 건수도 2008년 7210건, 2009년 2만6827건에서 지난해 5만3854건으로 급증했다. 식약청 관계자는 "부작용이 갑자기 늘었다기보다는 2006년부터 지역약물감시센터가 차례로 문을 열면서 자발적인 부작용 신고가 늘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부작용 방지시스템 아직 느슨

이런 의약품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지난해 말 처방조제지원시스템(DUR)을 도입했다. 의사가 처방하는 약이 환자가 이미 다른 병원에서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는 약과 중복될 경우 DUR 전산망을 통해 알려주는 것이다. 현재 쓰려는 약이 이전 처방에 따라 먹고 있는 약과 충돌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 때에도 경고 메시지가 뜬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함께 쓸 수 없는 약, 소아·노인에게 쓸 수 없는 약, 임신 중에 쓸 수 없는 약에 대한 정보를 의사가 처방하는 순간에 알려줌으로써 부작용을 미리 차단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며 "현재 전국 병·의원, 약국의 94%가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도입 초기 단계인 국내 DUR의 '그물망'은 아직 느슨하다. 아직까지는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전문약에 대한 정보만 제공될 뿐 처방전이 필요 없는 일반약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김씨의 경우처럼 '약효 과잉'으로 인한 부작용이 일어나는 경우도 알 길이 없다.

국내 DUR이 900여건의 정보만 담고 있는 반면 이미 1970년대 DUR을 도입한 미국은 3만5000건이 넘는다.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박병주 교수는 "기본적으로 모든 약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 만큼 꼭 필요할 때만 복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