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지난달 28일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에 위치한 제1가나안농군학교에 들어서니 학교의 교육이념이 새겨진 기념석(石)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 학교 김평일(69) 교장은 이날도 어김없이 이 글귀를 바라보며 시름에 잠겨 있었다.

"저희 아버지께서 여기에 '개척'의 삽을 꽂고 학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이렇게 잘 살게 만들어준 '새마을운동'의 요람인 이곳을 아들인 제가 지키지도 못하고, 문 닫을 위기에 처하게 했다는 데 대해 너무 죄스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지난달 28일 경기도 하남시 제1가나안농군학교에서 김평일(69) 교장이“애국심을 우선시하는 사람으로서 국가가 하는 사업을 반대하지는 않는다”며“그러나 이전할 곳이 없어 50년 된‘새마을운동의 발상지’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까 봐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말하며 한숨을 짓고 있다.

가나안농군학교는 지난 1962년 2월 김씨의 부친인 고(故) 일가(一家) 김용기 선생(1912~1988)이 "인격을 도야해 민족정신을 함양한 사회지도자를 육성하자"는 교육목표를 두고 설립했다. 6·25 전쟁의 폐허에서 굶주리고 희망을 잃은 국민들에게 의욕과 자신감을 불어넣는 게 그의 꿈이었다고 한다. 절약과 근로·봉사·희생을 모토로 시작한 학교는 '음식 한 끼에 4시간 노동'을 생활화했고, 치약은 한 번에 3㎜, 세숫물은 대야의 3분의 2 이상을 넘지 않게 사용하도록 했다. 5·16 후 일가가 일군 가나안공동체를 방문해 농촌발전의 가능성을 발견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가나안농군학교의 정신을 범국민적 의식·생활 개혁운동으로 발전시킨 새마을운동을 제창했다.

이후 강원도 원주의 제2가나안농군학교와 해외에 설립한 농군학교에서 국내·외 정치인·기업인·공무원·학생 등 약 70만명이 교육을 받았다. 지금도 "땀 흘려 일해야 한다"는 정신을 배우기 위해 2박3일, 또는 4박5일 일정으로 입교해 수련을 받는 이들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날 오전에도 행정고시 합격생들과 한 기업체 직원들 총 100여명이 입교해 강의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가나안농군학교가 존폐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가나안농군학교는 지난 2009년 보금자리주택사업 시범지구인 하남 미사지구 수용지에 포함되면서 철거가 기정사실화됐다. 이후 "도와달라"는 김평일 교장의 호소와 수료생들의 걱정이 이어지며 이 문제가 관심을 받았지만, 학교는 아직 이전할 곳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여기는 40년이 넘게 그린벨트로 묶여 있던 땅입니다. 교육에만 신경 썼지 돈을 벌 생각을 안 했으니 땅도 '임야'로 돼 있어요. 법적으로 따져서 준다는 보상금은 1만3000평쯤 되는 규모의 학교를 옮기는 데 턱도 없이 부족한데도 최대한 빨리 나가라는 겁니다.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라는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는 학교인데, 적어도 나가서 다시 학교를 할 만큼은 보장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집을 시세보다 싸게 공급하자는 보금자리 주택사업의 취지는 공감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부가 보상가를 산정하는 과정에서 원래 살던 사람들과의 상의가 전혀 없었다고 했다. 여기저기 하소연해보지 않은 게 아니다. 그러나 "담당공무원이 계속 바뀌면서 이전 담당자들이 구두(口頭)로 했던 약속도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법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는 게 김씨의 얘기다.

"요즘 과거 졸업생들 전화를 많이 받습니다. 보금자리 주택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는 당연히 그대로 있는 거죠?'라고 묻는데 제가 늘 할 말이 없더라고요. 그분들께 뭐라 드릴 말씀이 없고 그저 너무 죄송할 뿐입니다." 끝내 김씨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하남미사사업단 관계자는 2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학교측의 사정을 감안해 이전시기 등은 충분히 협의하겠다"며 "학교의 본관과 교회 건물만큼은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보고 경기도의 요청에 따라 유적지로 보전하는 방법을 검토중이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