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학생의 독서문화가 입시용으로 변질돼 무너지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과 4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김미정(가명·경기도)씨는 얼마 전 다른 학부모로부터 '독서 이력 과외를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과외 교사가 일주일에 한 번씩 책 10권을 강의하고 정부가 운영하는 '독서교육종합지원시스템' 사이트(reading.go.kr)에 들어가 대신 입력까지 해주는 데 한 달에 50만원이라고 했다. 김씨는 비용이 비싸 포기했지만, 다른 학부모 4명은 과외를 시작했다.

김씨가 과외까지 생각한 것은 독서 이력을 관리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씨와 아이들은 요즘 매일 밤 독서교육종합지원시스템 사이트에 접속해 그날 읽은 책을 기록으로 남긴다. 책 이름, 줄거리, 느낀 점을 쓰고 독서 퀴즈까지 풀다 보면 1시간이 훌쩍 지난다.

아이가 진짜 읽은 책을 기록할 때도 있지만, 김씨가 인터넷에 권장도서에 대한 줄거리 등을 미리 찾아 아이에게 브리핑해 주고, 그것을 아이가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 시험이나 학원 스케줄 때문에 아이가 너무 바쁠 땐 김씨가 아이 대신 사이트에 들어가 입력하기도 한다. 학생이 대충 훑어 보거나 아예 읽지도 않은 책이 마치 다 읽은 책으로 입력돼 독서를 많이 한 것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딸이 "그냥 책을 읽고 싶을 때 읽으면 되지 왜 이렇게 해야 하는 거냐"고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김씨는 "나중에 좋은 고등학교·대학교에 가려면 기록이 있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독서이력제' 때문에 사교육을 받는 학생도 늘고 있다.

지난 26일 서울 강남구의 한 논술학원에서 중학생들이 독서 관련 강의를 듣고 있다. 이 학원은 초등학생들의 독서 이력도 관리해준다.

독서이력제는 정부가 올해부터 전국 초·중·고생들에게 읽은 책을 온라인에 기록하도록 한 '독서교육종합지원시스템'. 정부는 학생들이 초·중·고 12년간 읽은 책에 대한 기록을 차곡차곡 모아 '독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이를 진로 교육을 할 때 활용하거나 대입 입학사정관 전형에 제출할 수 있게 하겠다며 이 제도를 도입했다. 지난 26일 서울 대치동 A논술학원에선 중학생을 대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 책에 대한 강의가 한창이었다. 강사는 그리스 로마 신화 중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줄거리와 주제를 요약한 프린트를 나눠주고, 의미를 설명했다. 이 학원은 보통 권장 도서를 한 달에 1~2권씩 선정하고, 책에 대해 강의를 한 뒤 각종 독서 이력 사이트에 입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A학원을 포함, 기자가 직접 서울 시내 15개 논술·독서 학원에 찾아가거나 전화해본 결과 모두 "독서 이력을 관리해 준다"고 했다. A학원 원장은 "정부는 독서 이력을 남기도록 요구하고, 국제중이나 특목고, 대학에 진학할 때 독서 이력이 활용되면서 문의해 오는 연령층이 초등학교 저학년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대치동의 한 독서토론 학원은 올 초부터 일정량의 책을 뗀 학생들에게 '증서'도 발급해준다. 공공기관이 공인하는 증서가 아닌데도 지금까지 100명 가까이 발급해갔다. 학원 관계자는 "국제중에 입학할 때 제출하겠다며 발급해간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중학교 2학년 자녀를 둔 김주희씨는 "독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것이 입시와 연결돼 있으니까 문제"라며 "공교육에서는 독서이력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고 학부모와 학생 개인에게 맡겨 놓으니 사교육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