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에 대한 각오를 적은 박정희 대통령 친필.

"우리 스스로가 우리 마을은 우리 손으로 가꿔 나간다는 자조·자립정신을 불러일으켜 땀 흘려 일한다면 모든 마을이 머지않아 잘살고 아담한 마을로 바꿔지리라 확신합니다. 이 운동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특유의 강단 있는 중저음이 중앙청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1970년 4월 22일 박 대통령이 한해(旱害) 대책 지방장관(현 도지사·시장·군수) 회의 중 새로운 운동을 처음 제창한 순간이었다. 좌중에 정적이 흘렀고, 대통령은 경북 청도 신도리의 단아한 풍경에서 새마을 운동을 착안했다고 덧붙였다. 대통령은 이후 남긴 친필에서 "확실히 이 운동은 우리 농촌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바람이요 서광이요 희망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22일이 '새마을의 날'로 정해진 연원은 그렇게 4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회는 지난 2월 이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했고, 새마을운동중앙회는 오후 2시 성남시 분당구 새마을중앙연수원에서 제창 후 첫 기념식을 연다.

박 대통령은 전국 3만5000여 마을에 시멘트 335포대씩을 무상 배포하는 것으로 새마을운동을 시작했다. 농민들은 거저 받은 시멘트로 무얼 할지 궁리해야 했고 함께 일해야만 했다. 자조(自嘲)에 젖은 농촌이 자조(自助)를 배워갔다.

1972년 3월 경북 청도군 운문면을 시찰하던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주민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고건 전 총리는 "초대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으로 대통령 명(命)을 진두지휘할 당시 야전침대에서 하루 2시간 자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다"며 "농민의 자율적 참여, 정부의 전략적 지원이 결합해 농촌 기반을 다졌다"고 회고했다.

새마을운동 초기이자 체제경쟁의 절정기였던 1972년, 한국은 1인당 국민총생산(GNP)에서 북한을 추월했다. 1974년엔 농촌 가구당 평균소득이 도시근로자 평균소득을 앞질렀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은 '새마을노래'와 함께 경쾌하게 퍼져갔다. 김유혁 전 새마을운동중앙회장(단국대 명예교수)은 "새마을운동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근대화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새마을운동은 제5공화국 들어 민간주도체제로 전환되면서 활력을 잃었지만, 농어촌 후계자 양성사업 같은 근간은 유지됐다. 6공 때는 '새 질서 새생활 실천운동'으로 계승됐다.

'독재자 박정희'를 비판했던 김영삼·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새마을운동을 좋게 보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해 발간된 자서전에서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이 잘살게 됐다는 것은 속임수였다"고 적었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에 일관되게 부정적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새마을운동은 민주화운동 시절 '군사정권의 정치도구'로 공격받았다. 1988년 전경환(전두환 전 대통령 동생)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 횡령사건은 치명적 오점을 남겼다. 그는 횡령·탈세·이권개입 등으로 징역 7년형과 벌금 22억원을 선고받았다. 전상인 교수는 "협동·자조 같은 사회적 자본을 활용한 전무후무한 지역개발 성공사례지만, 80년대 들어 순수성을 잃은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새마을운동중앙회는 다른 민간단체(NGO)들과 국가 지원금 공모 경쟁을 벌이는, 기금과 수익금을 주요 재원으로 삼는 민간단체다. 임종완 중앙회 홍보팀장은 "2000년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 제정 후 국고지원을 받기 위해 공개경쟁을 벌이면서 '관변단체'란 인식을 바꿀 수 있었다"고 말했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노령화와 결혼이민자 증가 등 새로운 시대적 요구를 안고 있다. 이재창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은 "다문화 가정 지원, 청년 지도자 육성, 새마을운동 세계화 등 시대 변화에 맞춘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