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국내 원전 이용률(설비용량 대비 발전 실적)은 91.7%로 세계 평균(76.0%)을 훨씬 웃돌았다. 고장으로 발전을 중단한 시간을 나타내는 '비(非)계획 발전손실률'도 0.6%로 세계 평균 5.3%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았다. 그러나 이 통계 숫자들이 대한민국 원전 설비와 원전 운영능력의 우수성을 보여준다고 믿기가 어렵다. 원전은 가동을 중단했다가 다시 움직이기까지 20일 걸린다. 1000Mw짜리 원전이 멈춰 서면 같은 용량의 화력발전소를 대신 돌려야 하는데 하루 10억원씩 든다. 원전 운용자들이 이런 막대한 비용 손실 때문에 자잘한 고장 따위는 무시하고 가동률을 높이는 건 아닌지 점검해봐야 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전과 이후의 원전 안전도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후쿠시마 원전은 규모 8.0의 지진에 견디게 설계됐지만 9.0의 지진과 뒤이은 쓰나미로 쑥대밭이 됐다. 원전 운영사인 도쿄전력은 "예상했던 범위를 넘어선 일이라서…"라고 변명했다. 우리 원전은 규모 6.5에 버티게 설계했다. 그랬으니 충분하다고 뒷짐질 일이 아니다. 한반도가 유라시아 지각판 한가운데가 아니라 아무르판이라는 작은 판의 경계지점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미사일 공격이나 항공기 충돌 테러 같은 '전혀 예상 못했던' 비상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전제 아래 원전의 안전기준을 파격적으로 높여야 한다.

고리 원전단지엔 5기의 원전이 가동 중이고 3기가 건설 중이다. 이곳서 부산역까지 직선거리가 30㎞쯤 된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단지에서 40㎞ 떨어진 마을에서 체르노빌 때 주민 강제이주 기준의 6배에 달하는 세슘이 검출됐다. 이 마을에선 앞으로 수십년 사람이 살 수 없다는 전망이 나왔다. 체르노빌도 사고 22년이 지난 지금까지 반경 30㎞까지 주민 거주가 제한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단지에서 30㎞ 거리의 반원형을 그리면 면적이 1413㎢로 4억평을 넘는다. 만에 하나라도 인구밀집 지역을 포함한 4억평의 땅이 방사능에 오염돼 수십년간 쓰지 못하게 되는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정부는 원전 규제·감시 업무를 운용·진흥 업무에서 떼어내 독립시키기 위해 원자력안전위원회를 설치키로 했다. 미국의 원자력규제위원회(NRC)는 위원 5명 가운데 2명이 따로 점심을 먹어도 속기사가 따라다니면서 발언을 기록한다. 위원회의 활동이 행동이 투명하고, 업계 로비에 영향받지 않고, 정치적 고려에서 독립된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원자력안전위원회도 정치적 고려나 상황 논리, 업계의 요구에 따라 안전 기준이 왔다 갔다 하지 않도록 독립성이 보장돼야 한다. 최근까지 원자력 분야의 핵심 인력을 배출한 대학은 서너 곳에 불과했다. 원자력 전문가들의 인간적 친밀성이 원전 안전평가의 공정성에 영향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국민의 원자력에 대한 불안과 거부감이 말도 못하게 커졌다. 원전의 안전 기준을 높이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원전 정책을 폐기하라는 요구도 나올 것이다. 국민 불안과 거부감을 완화시키려면 국민의 요구가 터져나오기 전에 정부가 먼저 앞장서서 원전 안전기준 강화를 이끌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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