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을 뜻하는 일본어 '가이진(外人)'에는 '이방인' 등 배척의 뉘앙스도 약간 담겨 있다. 그런데 3·11 대지진 이후 일본에서는 이 단어에서 새로운 단어가 파생됐다. '이웃과 직장을 버리고 비행기를 타고 도망간 외국인'이란 의미의 '플라이진'(fly人)이다.

일본이 3·11 대지진의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나 일상을 되찾아 가는 가운데, 후쿠시마 원전 방사선 누출 등을 피해 잠시 일본 서부나 해외로 떠났다가 사무실로 돌아온 현지 외국인 직장인들이 왕따 위기에 처해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23일 보도했다.

◆외국인들 "피신했다 돌아오니 동료가 화내"
신문에 따르면, 일본 내 대기업에서 일하는 일본어가 유창한 한 외국인 직원은 지난주 사흘간 오사카로 피신했다가 도쿄 사무실로 돌아온 직후 일본인 상사와 동료들이 자신에게 화가 나 있음을 느꼈다. 그는 "왕따를 피하기 위해서는 조심해서 행동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주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이 탈출을 권고하고 항공편을 늘리면서, 일본을 떠나는 외국인들의 탈출 행렬은 극에 달했었다. 이때 생겨난 단어가 '플라이진'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일본인들은 일상적으로 초과 근무를 하고, 회사와 동료에 강한 유대감을 느끼며, 직장을 인생의 중심으로 여기는 등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며 “외국인들의 탈출은 이런 일본에서 민감한 문화적 이슈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또 “외국인들은 가족이 먼저고 그 다음이 직장이지만, 일본인들은 가족과 회사는 하나이며 동등하다고 여긴다”는 도쿄의 금융인력 주선업체 ‘톱머니잡스닷컴’ 설립자 마크 핑크의 발언도 곁들였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3·11 대지진 이후 주로 주부와 아이들만 도쿄 등 피해 지역을 떠나 피신했고, 직장인들은 대체로 일터에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도쿄증권거래소(TSE)의 사이토 아쓰시 최고경영자(CEO)는 22일 기자회견에서 미국, 프랑스, 영국, 중국, 홍콩 등의 많은 외국인이 자국 정부와 가족들로부터 일본을 떠나라는 재촉을 받았다는 데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번 탈출 러시는, 지진과 후속 사태에 대한 해결 상황을 담담하게 전한 일본 언론에 비해, 외국 매체들이 호들갑스럽게 경보를 발령했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고 신문은 분석했다.

◆“‘플라이진’ 문제, 당분간 경영진에 숙제 될 것”

이런 분위기에서 직장으로 돌아오는 외국인들의 심경은 편치 않다.

도쿄에서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는 한 외국인은 지난주 동업자와 런던을 다녀온 것과 관련, 사업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마음이 편치 않다”고 털어놨다. 그는 “사람들이 내 행동을 비겁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게 확실하다”면서도 “굳이 거기에 반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현상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도쿄의 한 외국 투자은행 간부는 많은 종업원이 몸을 피한 것과 관련, “목숨까지 걸라고 사람들을 고용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우리는 업무에 복귀하는 직원들을 불필요하게 따돌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다만 ‘선의(善意)의 놀림이나 장난’ 정도는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문은 “이들 ‘플라이진’들의 도쿄 등 사무실 복귀로 인한 직장 내 화합 문제는 앞으로 수주 간 경영진들이 머리를 싸매고 풀어야 할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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