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논설주간

경제학자들이 '미스터 고(高)금리'로 자주 들먹이는 인물은 둘이다. 미국의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미에노 야스시(三重野康) 일본은행 총재다. 뛰는 물가와 싸워야 했던 목표와 고금리라는 정책수단은 같았으나, 두 사람에 대한 사후 평가는 판이하게 갈라졌다.

미에노는 1989년 5월부터 15개월 사이에 기준 금리를 2.5%에서 6%까지 단숨에 올렸다. 부동산 투기와 물가를 잡겠다는 의욕이 강했다. 고금리 정책은 그때 그를 '서민의 영웅'이자 '의적(義賊)'으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일본이 장기침체에 빠지면서 평가는 거꾸로 바뀌었다. 투기와 물가를 잡았지만 경제후퇴에 출발 총성을 울린 장본인으로 꼽힌다.

볼커는 '토요일 밤의 대학살'을 일으킨 악역(惡役)으로 출발했다. 미에노보다 10년 앞서 굳이 주말 오후를 골라 금리 인상을 발표했다. 무려 20% 선(線)까지 올린 고금리 고집이 '미스터 고통(Mr. Pain)'이라는 별명을 낳는 데 그치지 않았다. 벽돌공·농민들까지 들고 일어나 데모하는 통에 주머니 속에 호신용 권총을 넣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3년 후에는 물가가 가라앉고 주식시장이 불타올랐다. 달러화(貨)에 '강하다' '든든하다'는 형용사가 붙었다. "달러시대는 끝났다"고 했던 저명한 경제학자는 자기 예언을 취소하고 공개사과했다.

한국은행 김중수 총재가 엊그제 금리를 인상하면서 두 사람 중 누구를 떠올려 봤는지 알 수는 없다. 앞으로 몇 차례 더 금리를 올려야 할 그로서는 영웅이 될 것인지 마녀가 될 것인지 지금 조바심낼 필요는 없다. 어차피 긴 세월을 거치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김 총재가 싸워야 할 제1의 주적(主敵)은 물가다.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금융시장 안정 같은 숙제가 보태지긴 했으나,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는 물가잡기다. 물가를 놓치면 돈의 가치를 잃게 되고 돈이 휴지처럼 헤퍼지면 중앙은행 무용론(無用論)이 등장한다.

하지만 김 총재가 막상 전장(戰場)에서 마주치는 적은 물가가 아니라 정치다. 청와대와 먼저 싸워야 하고, 장관들과 다퉈야 하며, 국회의원들 협박에 맞서야 한다.

미에노는 집권당 최고권력자의 "일본은행 총재 목을 쳐서라도 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공개 협박에 시달렸다. 볼커는 금리를 강제 인하하는 법안까지 들고나오는 의원들과 싸웠고, 자신을 FRB 의장에 임명한 카터 대통령으로부터는 갖은 욕설을 다 들었다. 카터는 고금리로 경기가 풀썩 주저앉아 정권까지 잃었다고 불평했다.

한국은행은 이미 정치와의 싸움에서 밀리고 있다. 금리인상의 출발점부터 놓쳤다. 작년 7월부터 인상하기 시작했으나, 그보다 1년 전부터 뚜렷했던 경기회복세를 지나쳤다. 아무리 청와대의 압박이 거셌어도 작년 초부터 서서히 인상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까짓 몇 달 늦었다고 별 차이 있을까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몇 달 사이에 가계부채는 60조원 안팎 급증했고 물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저금리로 은행 대출받아 주식투자하는 개미들이 늘고 말았다. 꼭 필요할 때 중앙은행이 경고 벨을 울리지 않아 주부나 월급쟁이들이 빚을 무서워하지 않게 됐다.

800조원의 가계 부채는 금리 인상에 최악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대출이자 부담이 버겁다는 아우성이 내년에 선거를 치러야 하는 집권세력에는 큰 짐이 되고 있다. 그동안 성장과 경기 회복세 유지를 위해 저금리로 가라는 권력자의 지침은 곧 서민들 이자 부담을 덜어주라는 압력으로 바뀔 것이다. 김 총재는 다시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순간을 맞게 될 운명이다.

지난달 14일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 킹(King) 총재는 편지 한 통을 발송했다. "친애하는 장관님, 지난해 11월 소비자 물가가 관리목표 2% 선(線)보다 1%를 초과했다는 편지를 보내드렸습니다. 올 1월에도 4% 상승했다는 통계가…."

킹은 경기회복을 노리며 금리를 25개월째 올리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오스본(Osborne) 재무장관에게 3개월마다 보낸 물가 걱정 편지가 어느덧 다섯 통째다. 그때마다 편지는 공개된다. 중앙은행 총재가 정부를 향해 드러내놓고 경고장을 보내는 행동이다.

김 총재는 물가 걱정에 좀 더 목소리를 높이고, 더 용감하게 물가와 싸워야 한다. 지금처럼 낮은 포복으로 가면 충분한 경고가 되지 않는다. 빚 무서운 줄 모르는 국민들에게나 행정력으로 물가 잡겠다고 녹슨 칼을 휘두르는 권력자에게나.